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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Sep 03. 2016

큐복음서 / 예수처럼 죽는 삶이 아닌 예수처럼 사는 삶

김용옥 <큐복음서>



예수처럼 죽는 삶이 아닌, 예수처럼 사는 삶


Q80(눅 17:20~21)

예수께서 질문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들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고도 말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너희 안에 있느니라."


도올 선생님께서 2003년 중앙대 논어 강의 도중 말씀하셨던 게 떠오른다.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신약을 제대로 번역하겠노라고. 그 후 몇 년 간이나 나는 선생님이 번역할 성경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러나 책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선생님께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삶에 휩쓸려 예수의 참 뜻을 탐구하겠다는 학문적 열망을 까맣게 잊고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영풍문고 기독교 서적 코너에 전시되어 있는 선생님의 기독교 고전 번역작들을 보고 감격 또 감격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 앉아 책들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어떠한 종교적 전율을 느꼈다. 이거야, 이거야말로 내가 찾던 그것이야. 책을 사들고 오고 싶었으나 경제적 사정이 허락치 않아 당시에는 아쉽게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선량한 벗의 은혜로 <큐복음서>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다.


도올 선생께서는 예수의 사상을 심도 깊게 이해하기 위해 직접 고행의 광야를 거닐었다


큐(Q)란 '자료'를 뜻하는 독일어 크벨레(Quelle)의 이니셜이다. Q가 무슨 자료이냐 하면 공관복음서 중 마태와 누가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예수의 어록 자료이다. 공관복음서란 신약에 들어 있는 4복음서 중 그 성격이 특징적으로 다른 요한복음서를 제외한 세 복음서 마가, 마태, 누가 복음서를 이른다. 복음서란 학문적으로 분류하자면 전기문학작품인데, 공관복음서 중 마가복음이 이 전기문학작품의 핵심적인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예수의 전기 자료를 '마가자료'라고 부른다. 곧 마태와 누가 복음은 마가자료(예수 이야기)와 큐자료(예수의 말씀)를 참고하여 마태와 누가가 자신의 견해 및 새로운 이야기를 첨가하여 저술한 복음서인 것이다.


중앙일보 '도올의 복음서 이야기 26' 기사 중 발췌


지금까지 한국의 영향력 있는 대형교회들은 주로 마가자료 즉, 예수의 전기와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 이야기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해 왔다. 그리하여 대속자 예수관( 예수가 인류의 원죄를 대신 갚아주고 죽었다는 관점)과 천당지옥설, 종말론, 신비주의, 전적인 믿음의 중요성 등을 그들의 핵심 교리로 삼고 모종의 공포로서 대중들을 종교로 끌어들였다. 그들이 주장하는 세계복음화니 하는 것들은 구호는 거창하되 그 속 알맹이는 실제로 인류에게 아무런 시사하는 바가 없는 공허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독교도들이 예수처럼 사는 법이 아닌 예수처럼 죽는 법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부활과 천국으로의 직행 티켓만을 강조한다. 예수처럼 살기는 어렵고, (예수천국 불신지옥론에 따르면) 예수처럼 죽는 것은 쉽다. 예수처럼 산다는 것은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살듯이,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산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가르침)이 제거된 복음이란 사실 예수가 그렇게 거부했던 구약의 율법과 권력, 전쟁, 파괴의 언어 세계로 떨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수처럼 사는 법이 아닌 예수처럼 죽는 법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많은 교회들이 진정한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민간 설화 천당지옥설: 선행을 하면 천당에 가고, 악행을 하면 지옥에 간다. 이 이야기는 예수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천당지옥설은 페르시아의 민간 설화에서 출발하여 당대의 인도, 희랍, 중동 등에 널리 퍼져있던 민간 신앙일 따름이다. 페르시아 민간 신앙이나 불교에서도 천당과 지옥의 개념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에 목을 메는 이 마당에 <큐복음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도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학자가 대중의 언어로 <큐복음서>를 번역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예가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발간 이후 많은 논쟁이 있었고,  도올 선생 본인이 직접 신학 학술대회에 참가하여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큐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말씀은 너무나 간명하고 담백하여 아름답다. 예수는 그 어떤 공포도 선포하지 않는다. 예수는 말한다.


Q51


"너희 삶에 관하여 갈망하지 말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치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보라! 그들은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한 자의 시간이라도 너희 수명에 보탤 수 있겠느뇨?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임의로 할 수 없거늘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뇨?"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는 말한다. 무엇을 두려워함으로써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모든 것을 주께서 포근한 사랑으로 감싸주실 것이라고. 그러나 오늘 날의 많은 교회들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두려워하라고,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것을, 죄에 대해 두려워할 것을 종용한다. 예수는 천당과 지옥을 나누지 않는다. 예수는 인간이 그 악한 마음을 돌려(metanoia 회심: 우리는 흔히 '회개' 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회개라는 말은 '죄'를 전제로한 표현이다. 예수는 '메타노이아' 즉 마음 돌림을 말했을 따름이다.)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바로 그 순간,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고 명징하게, 신념에 차 말하고 있다.



예수는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 속에 심을 수 있다고 하였을까. 예수는 심오한 철학자는 아니었다. 예수는 담백한 실천가였다. 예수는 간결하게 말한다.


Q17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치 아니하실 것이요.

남을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치 아니하실 것이요.

남을 용서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Q18


남에게 주라, 그리하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을 흔들어 꼭꼭 차게 하고서도 넘치도록 더 채워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Q66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 사는 이웃을 청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 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청하라. 그들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라.


이 얼마나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말씀인가. 예수는 선언한다. 그냥 줘라. 돌려 받을 생각일랑 말고 무조건 그냥 사랑을 베풀어라. 마치 부모가 너희에게 베풀었던 것처럼. 예수가 꿈꾸었던 세상은 모든 사람이 서로서로에게 무한정한 사랑을 아무 대가없이 베푸는 사회였다. 그리고 그 사회가 바로 예수가 생각한 혹은 예수가 계시 받은 천국이요, 하나님의 나라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을 떠난 죽음의 세계가 아니다. 바로 살아 있는 이 세계 속에서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 평화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들이 모여 일구어내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예수처럼 죽는 삶이 아닌, 예수처럼 사는 삶에 앞장서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베드로의 교회가 생겨나기 이전 초기 예수 운동이란 "율법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서로서로 나누며 사랑하는 것 뿐'이오!"라며 선언하고 다닌 운동이었다. 그것은 매우 소박한 삶의 변화를 요구한 운동인 동시에 인간의 질적인 변화를 요청한 상당히 어려운 운동이었다. 잘못된 교회가 광고하는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예수만 믿으면 된다니까. 그러나 참으로 예수처럼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예수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벗어나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앞에 세우려 하는가.


기독교는 원시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아니, 비단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그 원시성을 회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큐복음서>를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참된 예수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되기를, 다시 예수의 말씀이, 진정한 복음이 이 땅에서 빛을 발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여태까지 쌓아왔던 삶의 방식들, 자기의 굳어진 마음을 돌리는 일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누구도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할 수 없으리라. 그것은 물론 이명박 장로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2008. 6월. 멀고느린구름.




뱀발 

도올 선생님의 <큐복음서>와 유사한 책으로 톨스토이가 편찬한 <요약복음서>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톨스토이가 4복음서에서 예수의 전기 및 기이한 행적들을 제외하고 교훈이 될 예수의 말씀을 가려뽑아 정리한 새로운 형태의 복음서이다. <큐복음서>와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초기 예수 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일독을 권한다. 1988년 홍익재에서 출간되었고 부록으로 도마복음서 번역본도 실려 있다.


뱀발2 

예수가 꿈꾸었던 사회는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분명한 답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다. 그것은 바로 거북섬원주민(인디언) 사회였다. 거북섬원주민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한정없이 베푸는 문화를 통해서 그 사회체제를 확고히 유지시켰던 매우 특별하고 아름다운 사회였다. 유럽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가 거북섬원주민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거북섬원주민들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천하고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거북섬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애써 듣지 않으려 했던 예수의 말씀을 가장 귀담아 들었던 사람들이었다.




2016년 뱀발 

이 글을 처음 쓴 시점으로부터 벌써 8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사이 한국 기독교의 교세는 눈에 보이게 줄어들었다. 교회 지도자들의 각종 부패와 성적 타락이 끊임없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만하면 자성을 할 법도 한데... 개신교는 자성보다는 '신천지'라는 새로운 적을 만들어내 기존의 커뮤니티를 공고히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천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세운 새로운 천주교의 기치와 선을 긋고, 보수성을 지키려고 하는 것 같다. 


2000년 전 예수께서는 천국이 '곧' 도래한다고 말씀했다. 당시 신자들은 '곧'의 의미를 빠르게는 2-3년, 최대치로는 20-30년으로 봤다. 하지만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천국의 도래는 요원해 보인다. 예수께서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말씀은 '조건부'였을 것이다. 아마, 이런 조건이 아니었겠는가. 


"여러분이 모두 저와 같이 살 수 있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곧 이곳에(여러분의 삶 속에) 도래할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2000년이 지나도록 예수께서 말씀한 '저와 같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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