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명진 Aug 11. 2016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야콥 하인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이어지는 기다란 고리를


"난 분명 죽게 되겠죠?"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난 죽고 싶지 않아요. 죽는 건 정말 소름 끼쳐요."

"아닐 거예요, 슈타르크 부인.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을지도 몰라요." 


어머니가 대꾸했다.


"도리어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몰라요. 아직까지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는 걸 보면." -73p-


이상은 님의 미발매 음반을 구했다. 너도 나도 경제 타령을 애창곡으로 부르고, 자본의 부속물이 되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내게 유일한 기쁨은 예술을 하고 예술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정판으로 구입한 이상은 님의 음반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나의 삶을 다시 한 번 힘껏 밀어 올려준다.

   

여유가 있으면 한적한 영풍문고 종로점에 들러 새로 나온 책들을 구경하는 것이 소소한 삶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몇 주 전에 영풍문고에서 발견한 야콥 하인의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도 나의 지친 어깨를 토닥여주며 삶의 기쁨을 수줍은 선물로 건네준 좋은 예술 작품이었다.

  

야콥 하인은 예전에 '야코프 하인'이라는 이름으로(그 사이 독일어 표기법이 바뀌었나 보다) 소개된 적이 있었다. <나의 첫 번째 티셔츠>라는 소설을 통해 그를 처음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수아 소설가가 번역해서 더욱 애착을 가지고 읽었던 그 작품은 무척 유쾌하면서도 작가의 정신의 날이 살아 있는 좋은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국내에 두 번째 소개되는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의 번역 역시 배수아 소설가가 맡았다. 야코프와 배수아 이 두 작가의 조합은 썩 어울린다. <나의 첫 번째 티셔츠>처럼 이 번 작품 역시 번역이라는 것을 크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읽혔다.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는 작가인 야콥 하인의 실화를 소설로 만든 것이다. 야콥은 그의 어머니 크리스티아네 하인의 죽음을 슬프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희미한 기억 저편에 기대어 있는 어머니의 역사를 한 발 한 발 찾아 나선다. 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으로서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어머니 이야기. 어머니도 기억 못 하는 어머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아버지 요하네스, 그리고 어머니를 길러준 어머니의 새아버지 차울렉 할아버지 이야기. 야콥은 어머니의 역사를 되뇌어 보는 동시에 자기의 유년시절 속의 어머니를 추억한다. 어머니의 유년과 야콥 하인의 유년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면서 두 사람이 가진 생명의 끈이 이어진다. 


어머니의 삶은 자식의 삶으로, 크리스티아네 하인의 역사는 야콥 하인의 역사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을 우리는 늘 어떤 끊어짐, 끝이란 의미와 연결시킨다. 하지만 죽음이 정말 그런 단절을 뜻하는 것일까. 하나의 죽음은 또 다른 삶으로, 한 세대의 의지가 다음 세대에게로 흘러들며 결국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이어지는 기다란 고리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할아버지 요하네스의 의지가 어머니 크리스티아네에게 이어지고, 그리고 다시 야콥에게 이어지는 것처럼.

  

"크리스티아네, 여기 와보니 결국은 히틀러가 이긴 것 같아." 

(중략)

 "네가 말했던 한 때 있었다던 이곳의 재단사, 상인, 상점 주인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니? 유대인의 삶은 어디로 모습을 감추고 만 거야? 뛰어놀던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그 엄마들은? 모퉁이마다 모여서 담소를 나누던 노인들은? 그들은 어디에 있니? 그들이 여기 말고 베를린의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 가, 거기서 유대인의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는 거니?"


어머니가 뭐라고 대꾸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침묵할 수밖에. 이곳 말고는 베를린의 그 어떤 거리에서도 유대인의 삶의 흔적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거란다. 결국 승리자는 히틀러인 거야."

마리온이 다시 한 번 말했다. -32p-


독일의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우리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못했다.


정말일까. 히틀러도 죽고 수많은 유대인도 죽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역사는 죽었지만 유대인의 역사는 살아 있다. 히틀러의 아이들은 골목길을 뛰어다니지 않지만 유대인의 아이들은 골목길을 뛰어다니고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기도 할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지나치게 이용해 전쟁을 일삼는 이스라엘의 정치꾼들에게는 혐오를 느끼지만, 고통 끝에 살아 남아 자신들의 문화를 다시 일으키려고 노력하는 보통의 유대인들에게까지 적대감을 보일 필요는 없을 터이다. 


야콥의 이야기는 어두운 일제 강점기의 터널을 힘겹게 빠져나온 우리네 어른들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었다. 오늘날 '한국인 다움'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제국으로부터 지키려 했던 그 '한국인 다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야콥은 유연한 사고를 보인다. 요하네스나 어머니의 어머니가 지키려 했던 '유대인 다움'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의지를 이어받는 것이 아닐까. 반드시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결혼식을 올리고, 꼭 코셜 푸드(Kosher food)를 먹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그런 것을 지키려 했던 앞 세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이어 가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전쟁의 끝으로 걸어가면 평화가 있다. 평화란, 누구나 자기다운 삶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부여받는 상태이다. 전쟁을 잊은 나라에게 평화는 없다는 격언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우리 모두가 전쟁을 완전히 망각할 때에만 찾아올 것이다. 우리 모두가 전쟁의 끝으로 걸어가 평화 속에 머물 때에만. 그러나 모든 인간이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자기답게 살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런 이들은 결국 전쟁의 방향으로 되돌아 걸어가고 만다. 


우리의 어머니가 지키고자 했던 것. 아주 작은 생명. 우리들의 아주 작은 삶.


만약, 당신이 어느 날 평화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우리의 어머니가 지키고자 했던 것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아주 작은 생명. 우리들의 아주 작은 삶을. 포탄이 날아오는 순간 가장 중요했던 것은 '어떤 형태의 삶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삶이라도' 지키는 것이었을 테니. 


야콥은 거시사(홀로코스트) 속에서의 미시사(크리스티아네의 역사)를 이야기함으로써 어머니의 작은 삶이 지니는 의미를 확장시킨다. 야콥 하인의 담백하고 재치 있는 문체를 따라 읽어가며 나는 내 어머니의 역사를, 그리고 아버지의 역사를, 또 한국인의 역사를 떠올렸다.


 전쟁을 잊은 나라에게 평화는 없다는 격언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우리 모두가 전쟁을 완전히 망각할 때에만 찾아올 것이다.


야콥은 시종일관 목소리를 높이거나, 권위에 찬 지식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고조곤히 풀어놓을 뿐. 덕분에 때론 잔잔히 미소 지으며, 때론 가벼운 서글픔을 느끼며 마치 5월의 가랑비에 젖어들듯 이 책을 읽었다.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바람에 떠밀린 듯 읊조렸다. 그래,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대단한 삶의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엄청난 업적을 가진 위인의 삶을 펼쳐놓지 않아도, 섬세한 문체로 마음을 휘젓지 않아도. 이토록 가만히 젖어들 수 있는 아름다운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문득, 5월의 가랑비를 닮은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2007. 5월. 멀고느린구름.


"2007년의 초고를 바탕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보강했습니다."

- 2016년으로부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