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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Nov 21. 2016

무속의 이야기를 찾아서 (최순실 시대의 여행기)

힐링로드 2 - 서사의 고향에서 문학의 풍경을 만나다

무속의 이야기를 찾아서

- 김동리『을화』편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우주적) 힘에게 나의 바람을 기원하는 일. 무속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


“한국 소설은 재미가 없다.”


밤길을 달려 다시 경주에 도착해 ‘한국 소설’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던 중에 읽게 된 댓글이었다. 여기도 저기도 다들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 소설은 재미가 앖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 폰의 불빛을 바라보던 나는 폰을 내려놓고 허공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수 년간 소설 장르에서 베스트셀러의 상위를 차지하는 것은 일본소설이나 영미권 소설이었다. 특히 일본 소설의 바람은 거셌다. 분명 내가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도 일본 소설의 흥행에 힘입어 출간된 책일 것이다. 여행의 종착지에 와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본의 <겐지모노가타리>를 마음에서나마 넘어서보고자 우리 서사문학의 출생지들을 직접 찾아가본 것이 아니었나. 비록, 여행을 통해 나 자신은 많은 영감을 받았지만 세상의 평가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새로운 서사들은 한국인의 마음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그 물음을 한국 근대 문학의 첫 단추를 꿰었고, 문단의 큰 어른으로 자리매김했던 소설가 김동리 선생께 던지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김동리 선생이 살았던 경주시 성건동으로 향했다. 아침 봄바람이 유난히 싱그러웠다. 몇 걸음 안 가서 ‘동리 생가’라고 표시된 표지판을 만났다. 경주시 성건동 168번지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선생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다른 집들이 지어졌고, 김동리 선생과는 상관 없는 이들이 살고 있다. 달라진 것은 김동리 선생이 집만은 아니다. 성건동 마을 전체가 바뀌었다. 김동리 선생은 상전벽해를 이룬 고향 마을에 대한 쓸쓸함을 단편소설 ‘만자동경’의 서두를 통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고향에 갔을 때 이미 그 성은 없어진 뒤였다. 옛날 성이 있었던 자리는 반반히 닦여진 채 꽤 깨끗한 상가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두 어깨가 아래로 축 처지는 듯했다. 어깨뿐 아니라 머리도 아래로 떨어뜨려진 채 나는 그 새로 난 상가를 덧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도 없는 울분과 허멍과 설움 같은 것이 뒤어겨서 머릿속을 하나 가득 메우고 있는 듯했다.”

- 문학사상사. 김동리 <을화> ‘만자동경’ 293쪽.-


1950년대 경주의 옛 모습. 무교 국가 신라의 고도인 경주는 그야말로 한국적 샤머니즘 전통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고장이다.


선생의 실망감이 역력하게 느껴진다. ‘만자동경’은 1979년에 발표된 작품이니, 만약 김동리 선생이 지금의 성건동을 봤으면 할말을 잃으셨을 것 같다. 옛 성건동은 김동리 선생의 대표 단편 ‘무녀도’와 장편 <을화>의 무대가 된 ‘무당촌’이었다. 집집마다 대나무가 걸려 있고, 그 나무 끝에는 펄럭이는 깃발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 흔적은 강변 길 끝자락에 아직 남아 있는 커다란 당산나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김동리 선생은 이 나무 주변에서 뛰어놀았다고 전해진다. 나는 나무를 한 바퀴 휘돌아보며 나무의 커다란 몸통을 쓰다듬어 보았다.


김동리 선생이 어릴적 놀았던 당산나무. 사진 출처 (http://blog.samsung.co.kr/4412)


옛 자취가 남아있는 성건동의 오늘날 모습. 거대한 밑동이 남은 나무는 아마도 과거에는 마을의 당산나무격이었지 않았을까?
옛 성건동은 김동리 선생의 대표 단편 ‘무녀도’와 장편 <을화>의 무대가 된 ‘무당촌’이었다

한민족에게 나무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민족의 시조부인 환웅이 신단수를 통해서 지상으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샤머니즘 전통을 지닌 많은 나라에서 나무는 지상과 천상을 잇는 통로로 여겨진다. 신은 나무를 통해 내려오고, 인간은 나무를 통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로부터 각 마을마다 가장 크고 튼튼한 나무를 신이 오고 갈 수 있는 당산나무로 지정해놓고 그 표식으로 오색의 천을 달아놓았다. 아주 오래전 단군이 도읍을 정할 시절에는 박달나무가 당산나무로 주로 선정되었으나, 이후 시간이 흐르며 느티나무나 소나무 등이 대표적인 한국의 당산나무가 되어 왔다.


마을의 무당은 이 당산나무 아래에서 다양한 굿을 행하며 마을의 길흉화복을 관리했다. 허나 이 모든 정신적 전통은 급속한 근대화 속에서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빠르게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요즘에도 길을 걷다 가끔씩 무슨무슨 철학관이라고 쓰인 건물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좀처럼 그곳에서 과거 우주적 스케일의 무속 정신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자연과 지나치게 떨어져 세속화된 샤머니즘에는 안타깝게도 고유의 정신과 멋이 실종되어 있다. 평생 소설을 통해 이 무속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김동리 선생에게는 고향의 변화가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으리라.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 남아 있는 이 거대한 나무들을 통해서야 우리는 무속신앙을 중심으로 통치가 이루어졌던 과거 신라의 우주적 스케일을 느낄 수 있다.


어째서 한국 소설이 재미가 없을까.

김동리 선생은 이 고향의 변화를 통해 그 답안 중 하나를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남긴 말이다. 바꿔서 말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문학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의 문학은 없다.”


영국에 가면 응당 셰익스피어 문학관이 있고, 그의 생가가 주요한 국가의 자산으로 보호를 받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셍떽쥐빼리, 러시아의 톨스토이, 미국의 헤밍웨이, 일본의 나쓰메소세키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작품 활동을 했던 한국인 소설가 중에 그와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이가 있을까. 내가 알기로 국내에 생겨난 대부분의 문학관들은 초기에 그 문인을 흠모해온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건립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국가적 지원과 관심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김동리 선생이 이럴진데 그 이전에 내가 찾았던 김소행, 채수, 김시습, 임춘, 일연이 관심의 영역에 들 수나 있었을까. 유럽과 영미권, 일본의 문학가들이 울창한 숲 속에 자신의 나무를 새롭게 심고 있다면, 우리의 문학가들은 항상 빈 허허 벌판에 묘목을 심고 있는 형국이 아닐까. 사람들은 울창한 숲을 거닐고 싶어하지, 어린 묘목이 듬성듬성 자라 있는 벌판을 걷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무리 일본문학으로서의 정통성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역시 무라사키 시키부와 나쓰메소세키의 나무가 우뚝 솟은 숲에 서 있는 것이다.


거의 폐허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김동리 선생의 생가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한다.


방향을 바꿔 형산강 줄기를 따라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다보면 강 건너 저 멀리에 사당이 하나 보인다. ‘금장대’라는 곳으로, 김동리 선생의 작품 ‘무녀도’의 주인공 모화가 마지막 굿을 하며 물 속으로 빨려들어간 곳이다. 그녀를 빨아들인 애기소는 경주의 서천과 북천, 남천이 모여 만드는 깊고 푸른 늪이다. 김동리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이곳을 지나다니며 늪을 바라보고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선생에게 ‘늪’은 현실 속에 드러나 있는 죽음의 세계와 같았다. 죽음은 예기치 않은 순간 사람을 빨아들인다. 어린 김동리는 소꿉친구 선이와 고종사촌 누이 남순의 죽음을 통해 삶 반대편에 있는 세계에 대해 민감해졌다.


당시 한국에 전파된 기독교는 삶 저편의 세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승의 삶보다 저승의 삶이 더 중요한 종교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조국은 저승보다 이승의 삶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 모순 속에 무속이 놓여 있었다. 무속은 삶 저편의 세계에서 힘을 빌려 삶 이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종교로, 그 중심축은 저승이 아닌 이승에 있었다. 사람이 구원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승의 삶이 좋아지는 것이 구원일까, 이승의 삶은 어떻더라도 저승에 가서 영생을 구할 수 있다면 구원 받는 것일까. 불교에서 말하듯 이승도 저승도 아닌, 이 윤회의 세계 자체에서 완전히 소멸해버리는 것(열반)이 참된 구원인 것일까. 김동리 선생은 그 답을 찾아 기독교, 불교, 유교, 무속의 세계를 평생 탐구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김동리 선생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리가게끔 한 장편소설 <을화>에 담겨 있을 것이다.


금장대의 모습. 사진 출처 (http://cfile8.uf.tistory.com/image/2308353D54C4A9BB220FC7)


금장대에 오르자 먼저 온 운동복 차림의 어르신이 계셨다. 7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내가 멍하니 강물만 바라보고 있자 특이하게 여겨졌는지 말을 걸어왔다.


“여행 왔어요?”

“네.”

“그러면 불국사나 왕릉을 가지 여기는 뭐하러 왔어?”

“김동리 선생님이 쓴 ‘무녀도’의 배경지를 다니고 있어서요.”

“아하, 김동리 선생.”

“아시나요?”

“그럼, 잘 알지.”

“혹시 어릴 때부터 아셨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아, 네.”


순간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대화가 끊겼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데 어쩐지 할아버지께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어 자리에 계속 있기가 불편했다. 자리를 떠나려는데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집안 어른이 최근에 돌아가셨구만.”

“어떻게 아셨어요?”

“보면 알아. 그래도 내가 이 마을에서 80년을 살았어. 허허. 젊은이 열심히 살게나. 복이 있을 거야.”


그 말을 남기고 할아버지는 유유히 반대편으로 걸어가버렸다. 할아버지는 무당촌 무당의 후손이었을까. 무당에는 두 가지 전승이 있다. 강신무와 세습무다. 강신무는 어느날 갑자기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는 경우다. 세습무는 집안에 전통적으로 무속의 피가 흐르는 경우다. 사실, 나로 말하면 집안에 무속의 피가 흐르고 있는 쪽이다. 그래서 그런지 허구헌날 길거리에서 도인들의 표적이 되곤 하는데, 어쩌면 금장대에서 만난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도 어떤 묘한 인연의 끈이 있어 서로를 끌어당긴 것은 아닐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삶의 의미는 언제나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나.


<을화> 속에 묘사된 옛 경주 무당촌의 모습을 추정해볼 수 있는 옛 사진


금장대를 내려와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이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로 향했다. 동리목월문학관. 불국사 옆에 자리한 이 문학관은 김동리 선생과 시인 박목월 선생을 함께 기념하고 있는 곳이었다. 생가는 허물어지고 없지만 그나마 문학관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불국사행 버스는 한적했다. 불국사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굉장히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20여년 전에 떠났던 수학여행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학생들의 입장에서야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것이 지긋지긋하겠지만, 민족대단결의 차원에서는 어쩌면 굉장히 의미 있는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는 모두 경주 불국사 수학여행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민족입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농담이다.


불국사에 와서 불국사를 가지 않은 것은 또 처음이었다. 외국 관광객 10여명이 모여 있는 불국사 입구를 뒤로 하고 반대편으로 걸어가니 조그만 도로가 나왔다. 그 건너편 아래에 놓인 다리를 지난 곳에 동리목월문학관이 있었다. 활짝 꽃봉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벚꽃이 노을빛에 물들며 본 적 없는 신비한 색을 만들어냈다. 봄과 밤이 만났을 때의 색이라고 하면 좋을까. 동리목월문학관은 어딘가 청와대를 닮은 듯한 담백한 건물이었다. 돌을 쌓아올린 벽에 기와를 올린 모습이 꼭 김동리 선생의 작품 같았다. 근대란 그릇에 전통의 정신 한 공기.


불국사에 와서 불국사에 가지 않다니


동리목월문학관


동리문학관 내부에는 선생의 작품들이 연대기에 따라 차례로 소개되어 있고, 선생이 쓰던 필기구나 친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었다. 한 편에 따로 선생의 집필실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인 문학관의 구성이 예전에 양평에 있는 황순원문학관에서 본 것과 상당히 흡사했다. 문학관 구성에도 일종이 유행이 있는 것일까. 이런 구성이라면 무척 만족스러우니 얼마든지 유행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나는 특히 김동리 선생의 집필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무심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 같지만 자연스런 질서가 있는  방의 모습이었다. 문학관을 다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큐레이터 분께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오늘의 다섯 번째 방문자라고 했다. 둘러보고 나올 때가 문학관의 폐관 시간 무렵이었으니 내가 반가운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문학관 내부가 놀이공원이나 맛집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도 그닥 아름답지 않은 광경이겠으나, 하루 다섯 명이라니 너무 하다 싶긴 했다.


김동리 선생의 중심 활동지와 문학관이 너무 떨어져 있고, 관광객의 눈길이 미치기 어려운 곳에 있는 탓이다 싶었다. 만약 내가 아름다운 문학관과 사람들이 자주 찾는 문학관 중 어느 쪽이 좋으냐고 물으면 사실 전자라고 답하긴 할 것 같다. 허나 돌아가신 김동리 선생의 뜻은 어떨지 알 수 없으니, 모쪼록 유가족이나 제자들이 잘 살피기를 응원할 도리밖에 없겠다. 방명록을 쓰고 큐레이터 분에게 뭔가 김동리 선생에 대해서 물어볼까도 싶었으나 그냥 묻지 않고 돌아서 문학관을 나왔다. 예술가의 가장 내밀한 것, 본원적인 것은 작품이 말해주는 것이지, 그 지인들이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이 탄생한 곳을 걸어보았으니 그만하면 충분히 선생의 심연에 다가가본 것이 아니겠는가.



문학관 밖의 노을은 조금 더 짙어져 있었다. 하늘과 산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날의 노을은 정말 찬연한 금빛이었다. 멀리 불국사를 둘러싼 산봉우리들, 오래된 목조 건물들, 돌로 지어진 다리, 활짝 핀 벚꽃, 향기를 머금은 봄 저녁의 바람.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에서부터 서사의 고향을 따라 걸어온 이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의 서사문학은 군위에서 일연 선생이 기록한 단군 신화를 시작으로 경주의 한 무당촌에서 자란 문학소년이 쓴 근대 소설로 마무리되며 그 1막을 내린다.


그렇게 보면 참 기묘한 일이다. ‘단군’이라는 말의 어원은 대체로 알타이어 ‘텡그리’에서 찾는다. ‘텡그리’는 하늘을 뜻한다. 그리하여 단군은 곧 ‘하늘과 소통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늘과 소통하는 이가 누구겠는가. 바로 무당이다. 단군은 제정일치 사회에서 하늘에 제사를 주관할 수 있고, 하늘의 힘을 조종할 수 있었던 무속인이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 무(巫)에서 시작한 우리 한민족의 이야기는  무(巫)에서 그 1막을 내렸다.


이주 오래 전부터 같은 하늘에 뜨고 졌을 달이 오늘도 빛나고 있다


결국 김동리 선생에게서 답을 듣지 못했다. 한국 소설이 왜 오늘날 한국인의 마음을 끌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의 답 말이다. 허나 그 대신 나는 이 긴 여행을 통해 다른 답을 하나 얻었다. 무엇이냐 하면, 모든 서사문학의 선배들이 바로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평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일연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을 모아 남김으로써, 임춘은 현실의 문제를 우회하여 이야기 함으로써, 김시습은 천재적인 재치로써, 채수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을 통해, 김소행은 억울하게 죽은 이를 새롭게 부활시켜, 그리고 김동리는 민족의 근원을 향해 파고 들며 우리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그 노력이 비록 온전히 우리를 흔들어 놓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선배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답안을, 최선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거기에서 아직 우리가 온전한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제 그 질문에 답할 책임은 다음 세대에게로 넘어간 것이 아닐까. 과연 다음 세대는 그 질문에 답했을까. 신라에서 시간을 따라 근대까지 흘러온 나는 그 다음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우리의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이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흘러 지금은 어디에 닿아 있을까. 왜 아직도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에서 충분히 재미를 얻지 못한다고 말할까. 해결되지 못한 질문들과 함께 내 마음 속에서는 다음의 여행 계획표가 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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