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로드 2 - 서사의 고향에서 문학의 풍경을 만나다
2시간이나 군위 구석구석을 돈 끝에 가까스로 인각사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바로 눈 앞에 인각사 대웅전이 보였다. 그러나 먼저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길 건너편의 학소대였다.
누가 일부러 잘라놓은 것처럼 바위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는 300여미터 높이의 벼랑, 그 앞으로 흐르고 있는 에메랄드빛의 냇물. 학이 머물다 가는 곳이어서 학소대가 되었다는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순백의 단정학 한 마리가 흐르는 냇물의 가운데 고고하게 서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다가가자 학은 이내 포르르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학이 떠난 자리에 대신 서서 단면을 드러낸 바위의 나이를 추측해보았다. 해발 828미터의 화산 정상부였다. 응당 일연 스님과 나 사이의 나이 차보다는 훨씬 더 헤아릴 수 없는 차이가 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연 스님도 아침 저녁으로 이곳으로 내려와 세안을 하고, 날아드는 학을 어여삐 바라보며,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지 않았을까. 혹은 오늘처럼 봄볕이 좋은 날이면 붓과 벼루, 종이를 들고 나와 물과 바위, 하늘을 벗하며 『삼국유사』를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사적 제37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인각사는 일연 스님에 의해 창건된 절이지만 수차례 불에 타고, 전쟁 등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중엽에 중건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보다 사람이 만든 것에 가치를 더 둔다. 가치가 있기에 더 탐하게 되고, 망가뜨리게 되기도 한다. 오래전 일연 스님이 머물렀던 인각사는 분명히 지금의 인각사가 아니다. 허나 이 학소대만은 분명 일연 스님이 보았던 그 학소대이지 않을까. 사람들이 새로 세워 뜻을 기리는 저 건축물보다 일연 스님을 더 잘 담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 학소대의 작은 돌멩이 하나일 것이다.
한참 동안을 학소대에 머무르다 도로를 건너 인각사 쪽으로 넘어왔다. 특별히 입구랄 것도 없이 그냥 도로에서 한 발짝 걸음을 옮기면 인각사의 경내인 식이었다. 비슷한 절로 서울 종로의 조계사를 들 수 있겠지만 그곳은 그래도 엄연한 문이라도 있으니 훨 나은 편이었다. 인각사의 경우 선명한 경계가 없으니 꼭 도로변에 버려진 절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옛날 이 도로가 없었던 때에는 바로 앞에 학소대와 맑은 개천을 두고 있는 청아한 도량이었을 것이다. 도로도 차도 없었을 시절에는 해발 800여미터에 달하는 이곳까지 걸어 올라오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인각사’ 표지석에 새겨진 글자가 인상깊다. ‘인각’이란 기린의 뿔을 뜻한다. 여기서 주의. 런닝맨에서 활약 중인 이광수 씨의 별명에 해당하는 ‘기린’이 아니라, 동양에서 용, 주작 등과 함께 신비의 영물로 여겨지는 ‘기린’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 기린은 하나의 동물이 아니라 수컷인 ‘기’와 암컷인 ‘린’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의 발굽과 갈기를 지닌 동물로, 수컷인 ‘기’에게는 이마에 외뿔이 돋아나 있다. 그런데 이 뿔은 부드러운 살로 되어 있어서 상대를 해칠 수 없다고 이른다. 더군다나 이 ‘기’와 ‘린’은 숲 속을 걸어다닐 때도 살금살금 다니며 발에 풀벌레들이 밟히지 않게 조심하고 다닌다고 한다. 그 때문에 불교에서는 특히 불상생의 도를 실천하는 영물로 추앙받아 온 것이다. 재밌는 것은 중국에서 발견된 초기 기린 조각을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사슴보다 뿔 달린 말에 더 가까왔다는 것이다. 뿔 달린 말하면 혹시 생각나는 것이 없는지? 그렇다. 바로 서양 전설에 등장하는 하늘을 나는 말 유니콘이다. 재밌는 것은 또 하나 있다. 동아시아에서 아프리카 지역에서 서식하는 목이 긴 사슴형의 동물(실제 기린)을 기린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이 중국 명나라 시절 사신이 잡아온 아프리카 기린을 보고, 바로 그 전설의 기린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것. 이야기는 이렇게 돌고 돈다.
일연 국사가 ‘인각사’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연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전승이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이 화산의 형상이 전설의 동물 기린의 모습을 닮았고 절이 자리한 곳이 뿔의 위치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민간 전승) 둘째는 어느날 전설의 동물 기린이 이곳을 지나다가 뿔을 학소대 절벽에 얹어 놓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동국여지승람 전승) 나는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두 이야기다 분명하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화산의 형상을 보고 뿔의 위치를 보려면 이 화산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봐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을까. 또 전설의 동물 기린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하필이면 왜 저 높은 학소대 위에다가 뿔을 얹어 놓아야했을까? 그리고 그 행동은 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어느 자료를 찾아봐도 이 의문에 대해 정확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현장에 오면 무언가 탁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싶었는데 아쉽게 그렇지도 않았다. 다만, 그 의문을 통해 아직도 기린의 뿔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인각사에 찾아와 안내판에 쓰인 그 해설을 읽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선으로 기린의 뿔을 찾았다. 그들이 찾아낸 상상의 뿔은 저마다 다르게 생겼기에 각자의 이야기로 그들의 인생에 남을 것이었다.
인각사의 공간에 들어서면 정면 저 멀리로 네모난 일연선사생애관이 보이고, 오른 편으로는 신라의 발굴 유물들을 잔해처럼 늘어놓은 외부 전시장이 보였다. 중심 건물인 극락전은 왼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극락전을 중앙으로 두고 ㄱ자 형으로 오른편에는 일연 국사를 기념하는 국사전이, 왼편에는 종무실로 쓰이는 한옥 두 채가 놓여 있다.
먼저 발길이 향한 곳은 일연선사생애관이었다. 일연선사생애관에는 일연선사 및 삼국유사와 관련된 옛 서적들과 유물 사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깔끔하게 구성된 점과 중앙 기둥에 걸린 일연선사의 초상화가 인상에 남을 뿐 특별히 눈길이 가는 요소는 없었다. 다만, 아이들과 함께 왔을 경우 벽에 걸린 해설들을 함께 읽으며 일연 선사의 생애나 업적에 대해서 배움을 얻기에는 유용할 듯 했다.
일연선사생애관을 휘 둘러보고 나와 옮겨 간 곳은 극락전이 있는 마당 쪽이었다. 인각사는 정유재란(1597) 시 가또키 요마사 휘하의 왜적들에게 전소되었다가 임진왜란 종결 후 조선 중종 때인 1630년에 신희(申熙) 스님에 의해 중건되었지만 18세기 이후 민간에 의해 전각과 일연 국사의 비가 파괴되고, 1934년에 대웅전이, 1958년 요사채가 붕괴되는 등의 참화를 겪었다. 현재 남아 있는 극락전은 낡고 헐은 것을 대강 보강하여 사용하다 몇 년 전 붕괴 조짐 등이 있어 2011년을 기점으로 재중건에 들어가 완공한 건물이다. 거의 새 건물과 다름 없었다. 독특한 것은 전통적 풍수지리학에 의거해 남향으로 중심 건물을 짓는 것과 달리 이 극락전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서방 정토를 바라보고자 하는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극락전과 오른편에 놓인 국사전 사이에는 ‘명부전’이라는 현판이 걸린 작은 정방형의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이는 오늘날 인각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 건물로 그나마 문화재로서 가치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남아 있는 세 건물 중, 내 마음을 끄는 것은 국사전이었다. 현대에 지어진 극락전이나, 일연선사와는 큰 연이 없을 듯한 명부전은 외관만을 살펴본 후, 신발을 벗고 국사전 안으로 들어갔다. 볕이 들지 않아 건물 안은 어두컴컴하고 냉기가 감돌았다. 다행히 일연 선사의 초상이 내걸린 중앙에는 전통 문양의 방석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나는 가방을 한 켠에 내려놓고 1000여년 전의 글 선배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삼배를 올렸다. 마지막에 일어서 허리를 굽혀 반 절하고 일연 선사의 초상을 올려다보는데, 마치 내게 흐뭇한 미소를 보내는 것 같았다. 저승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정말 내려다볼 수 있다면, 지금 일연 선사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마치 그 질문에 대답인 듯 일순 가슴이 뜨거워졌다. 잠시 방석 위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좌선을 한 뒤, 국사전을 나섰다.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국사전 뒤 켠에는 보물 428호인 보각국사비가 새로 지은 비각(碑閣) 안에 모셔져 있다. 고려 충렬왕 21년 1295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일연 스님의 제자인 법진 스님에 의해 지어졌다고 전해져 온다. 비문의 글이 당대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서 만들어진 탓에, 왕희지의 글을 탐낸 이들이 수 백년에 걸쳐 탁본을 해갔다. 그로 인해 비석은 심각한 손상을 입어 현재 육안으로는 거의 본래의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다시 한번 무용지용의 도를 떠올리게 되는 부분이다.
보각국사비를 보고 그대로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야트막한 구릉 위에 돌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첫 번째 돌은 보각국사정조지탑으로 일연 스님의 사리가 봉안된 부도(浮屠), 사리탑이다. 두 번째 돌은 법진 스님이 쓴 일연 스님의 묘비다. 세 번째 돌은 창작 연대 미상의 앉아 있는 부처상이다. 세월의 풍파에 원래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어쩐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만 같은 부처상이었다. 나는 일연 스님의 부도 앞에서 다시 한번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보통 사람들에게 사리는 고매한 승려들의 몸에서만 나오는 진주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래의 사리는 인도어 ‘샤리라’를 한자어로 음차한 것으로 그 원 의미는 ‘뼛가루’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로부터 화장(火葬)을 하는 인도였기에 열반에 든 부처, 싯다르타 역시 화장으로 장례를 치뤘을 것이다. 부처도 사람이었기에 응당 샤리라(뼛가루)가 나왔다. 제자들은 이 뼛가루를 신성하게 여겨 인도 전역의 주요 사찰에 골고루 나누어 줬고, 몇몇 가루들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 땅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인 뼛가루를 의미하는 ‘샤리라’는 부처의 신성한 뼛가루를 의미하는 ‘사리’로 변화했다. 오늘날의 인도에 ‘샤리라’라는 말과 옛부터 이어져온 그 의미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영 사리의 원래 뜻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구전으로 단군이라는 말이 전해와도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경내의 문화재들을 둘러본 후 인각사를 나와 도로를 따라 걸어보았다. 복원 공사 중인 터를 지나자 새롭게 복원해 놓은 보각국사비가 멀리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돌길을 따라 모조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모조 보각국사비와 나란히 서서 앞을 보니 곧바로 학소대가 눈에 들어왔다. 장엄한 풍경이었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단정학이라도 한 마리 날아오른다면 선계의 풍경과 다름 없을 듯했다. 일연 스님은 바로 이곳에서 천 년의 이야기를 썼다. 다음 천 년의 이야기는 누구의 손에 의해 쓰여 다음 세대로 이어질까. 문득 그 주인공이 궁금해졌다.
한적한 도로를 따라 한참을 더 걸어내려가니 일연 공원을 조성하고 있는 곳이 나왔다. 13세기의 일연 스님은 이곳까지 걸어내려와 보기도 했을까. 공원은 아직 조성 중이라 어수선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말끔하게 만들어져 있어 감탄했다. 지역 주민들의 휴식처로는 물론 역사 공원으로서의 가치도 잘 조화시키고 있는 구성을 하고 있었다. 자연과 인공미가 적절하게 조화되어 있는 점도 훌륭했다. 설계자를 만난다면 진심으로 칭찬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공원 앞으로는 강남 빌딩 높이의 기암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공원과 절벽 사이로는 강이 흘렀다. 상류의 군위댐 덕분에 공원 앞으로 흐르는 강은 수위가 꽤 높았다. 강 저편에 개인택시를 끌고 이웃들과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져 벤치에 앉아 봄볕을 즐겼다. 잠시나마 일연 스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 옛 마음을 떠올려 본 덕분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모든 것이 이야기라는 것. 절벽도, 강물도, 오래된 절도, 나무도, 사람이 지은 도로와 공원도, 그리고 놀러 나온 보통 사람들의 웃음도 이야기를 남긴다. 일연 스님은 만물에 깃든, 혹은 만물이 뿜어내는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오래전 읽은 소설 창작 개론서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소설가는 잘 말하는 사람이라기 보다 잘 듣는 사람이다.’
* 모든 사진 = 멀고느린구름(장명진) / Sony A7 / Contax G 28,45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