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공드리 <무드 인디고>
듀크 앨링턴의 오래된 엘피를 설마 그런 곳에서 발견할 줄은 몰랐다. 새해가 막 시작되고 고작 두 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동네에 새로 오픈한 독립서점의 중고책들 사이에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피아노를 치는 듀크 앨링턴의 그림이 놓여 있었다. 곧 자켓의 뒷면을 살폈다. B사이드의 첫 곡이 바로 ‘무드 인디고’였다. 주저하지 않고 질렀다. 집에 돌아와 주방의 엘피 플레이어를 켰고, 레코드의 B면을 올렸다. 무드 인디고가 시작되었다.
듀크 앨링턴은 미국 워싱턴의 제법 느긋한 가정에서 태어나 75세의 나이까지 느긋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7세부터 밴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일찍이 그 재능을 인정받고 유명해졌다. 그는 틀림없는 천재였으나, 지나치게 오랜 세월 천재로서 변함없이 산 덕분에 괜히 천재 같지 않게 느껴진다. 그의 음악이 지닌 끝을 알 수 없는 느긋함은 그런 그의 인생을 닮아 있다.
그에 비해 영화 <무드 인디고>의 원작을 쓴 소설가 보리스 비앙은 고작 39세의 나이로 죽었다. 재즈 트럼펫 연주가이기도 했던 보리스 비앙은 듀크 앨링턴을 동경했다. 프랑스인 보리스 비앙에게 재즈는 곧 미국의 음악이었다. 버논 설리반이란 미국식 필명으로 소설을 쓰기도 했던 보리스 비앙이지만 죽는 날까지 동경하던 미국에 가보지 못했다. 보리스 비앙의 삶은 그다지 느긋하지 않았다.
미셸 공드리 감독은 느긋한 듀크 앨링턴의 음악으로 느긋하지 않았던 보리스 비앙의 소설을 감싼다. 덕분에 영화 <무드 인디고>는 몹시 느긋하면서도 전혀 느긋하지 않은 영화가 되었다. 엘피 시대의 음반은 A면과 B면의 색채가 다르다. A면이 대중적이고 경쾌하다면, B면은 실험적이고 어둡다. - 물론, 모든 음반이 그런 것은 아니다. - 영화 <무드 인디고>에는 A면과 B면이 있다. 무드 인디고 A에서는 꽃이 피어난다. 그리고 B에서는 꽃이 진다.
A를 한껏 드러낸 예고편을 보고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관을 찾았을 많은 연인들은 분명 영화관에서 시들어 말라 비틀어진 꽃다발을 안고 나오며 울적했을 것이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구름 관람차를 타고 파리의 에펠탑 꼭대기까지 갔다가 뚝 떨어졌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삶이 우연이라면 우리는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
달콤한 로코물인 줄 알았던 <무드 인디고>는 피와 살이 튀기는 - 정말이다. - 잔혹한 풍자극이었다. 원작인 보리스 비앙의 소설 <세월의 거품>은 1946년에 쓰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소설가가 그린 상상의 프랑스는 여전히 낭만적이고, 기발하게 혁신적이지만 - 전화 교환원을 통해 웹서핑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화상 통화로 원격 요리를 하는 등등 - , 한편으로 대량 학살 전쟁이 초래한 생명의 경시 풍조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곳이다. 보리스 비앙은 인간이 전쟁을 충분히 반성하지 않고, 생명을 가벼이 여긴 채로 미래를 맞았을 때의 모습을 그린다. 대비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은 몹시 진보적이다. 흑인이 백인보다 훨씬 고학력이며, 매력적이고, 부유하다. 여성이 남성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과학문명은 몹시 발달했다. - 단, 의학과 총기 제작 기술만 19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 -
<무드 인디고>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는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연약한 목숨을 유지하다가 우연히 죽는다.”고 말했다. 삶이 우연이라면 우리는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 약속은 어느날 우연히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무드 인디고>의 주인공 두 사람, 콜랭과 클로에는 사르트르를 비웃으며 미래를 다음과 같이 약속한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영원’은 약속의 언어다. 하지만 결코 듀크 앨링턴의 음악을 들으며 느긋하게 지키기는 어려운 약속이다. 꽃이 필 무렵에는 지키기 쉬워도, 꽃이 질 때는 지키기 어렵다. 두 사람의 사랑이 지켜졌는지에 대한 해석은 아마 저마다 다를 것이다. 꽃이 시들고, 영화의 화면마저 흑백이 되었을 때 콜랭은 이렇게 말한다.
“클로에가 죽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순간순간 현명한 선택을 하며 자기 자신을 지켜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던 사르트르와 사랑을 지키지 못하면, 삶 전체를 잃는 것과 같다고 여겼던 보리스 비앙. 듀크 앨링턴의 음악이 과연 이 둘 중 어디에 더 어울릴지는 여러분도 나도 충분히 모른다.
다만, 잿빛이 된 꽃다발을 들고 영화관을 터벅터벅 나섰던 나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는 <무드 인디고>의 가장 컬러풀한 장면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콜랭과 클로에의 흥미진진한 결혼식과 들뜬 입맞춤이 피식 웃음을 짓게 한다. 이 글을 쓰는 사이 듀크 앨링턴 레코드의 B면을 몇 번이나 반복해 들어버렸다.
이제 다시 A면을 들을 차례다.
2018. 2. 19.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