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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Aug 05. 2015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린 늘 마지막 같은 진심을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러므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리는 늘 마지막 같은 진심을


2009년에 출간된 김연수 작가의 단편집에는 동명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다시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제목의 이 단편은, 제목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풀어지는 이야기,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정서, 붉은 노을과 하늘을 가르는 두루미 떼의 정경은 한 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그 소설을 읽을 때에는 세계적으로도 흰두루미가 많이 찾아온다는 철원에 있었다. 거기다가 핵심 철새 도래지인 DMZ 부근에서 장교로 복무할 때였으니 책의 이미지들은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었다. 오랫동안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흰 두루미 떼의 이미지는 결국 나로 하여금 유사한 느낌의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 그렇게 쓰여진 것이 내 소설 <단 한 번 날아오르는 순간>이다. 


서점을 드나들 때마다 이 책을 눈여겨 보았다. 책의 제목, 디자인, 그리고 표지 사진까지 너무나 완벽한 책이었다.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서 꿈꿔왔던 책과 흡사했다. 그래서 더욱 책을 섣불리 집어 오기가 두려웠다. 혹시 장편으로 바뀐 내용이 실망스러우면 어떡하지. 저렇게 완벽한 제목에 완벽한 표지를 달고서 정작 책의 내용은 붕괴하는 현실을 맞닥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2007년에 발간된 책을 2012년 1월 경에서야 구입했다. 구입하고서도 책장에 진열만 해두고 한 동안 읽지 못하던 것이 그해 여름이 되어서야 읽게 되었다. 


단편과는 전혀 달랐다. 한 장의 사진. 붉은 노을. 이 정도의 이미지만이 공통이었다. 그리고 딱 115페이지까지만 내가 기대했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었다. 주인공 나와 운동권 여학생 정민과의 러브스토리가 우주적인 세계관과 삼촌과 할아버지로 대변되는 미지의 존재들과 뒤섞이면서 굉장히 몽환적인 정경을 눈 앞에 펼쳐냈다. 그러나 그 후 이어지는 시대와 개인의 갈등, 역사적인 사건의 개입 등은 굉장히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기대보다는 다소 균열이 많은 작품이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주가 유한하다면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한 사람밖에 없다. 반면, 우주가 무한하다면 평행세계 속에서 무수한 나가 존재할 것이므로 나는 혼자가 아니게 된다. 칼 세이건의 우주론을 빌려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공교롭게도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우주는 직사각형에 체스판 모양을 한 유한한 우주이다. 그렇다면 '나'는 역시 오직 나 하나뿐인 것일까. 소설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눌 수 있다. 1부가 나와 정민과의 개인적인 관계맺음을 깊게 파고든다면, 2부는 나라는 개인 너머에 있는 세계의 무게와 압력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1부를 통해 어두운 세계를 초월하는 개인의 세계를, 2부를 통해서는 그 초월이 란 것이 찰나에 불과하며 개인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시대와 세계 속에 종속될 수밖에 없음을 서술하고 자 한 것이 아닐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어떤 사랑을 하고, 누구와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게 되던지 결국 우리는 '나'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 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거대한 시대의 흐름이나 세계의 압력 앞에서 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며, 개인의 외로움따위는 더욱 흉폭한 고통 앞에서는 한낱 사치에 불과하게 된다. 결국, 사람의 삶이란 개인과 세계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이해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과연 진정한 이해일까. 세계가 평화로와지면 진정 개인의 마음에도 자연히 평화가 깃들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세계와 싸워왔다. 투쟁했고, 죽음을 맞이했으며, 개인적인 것들을 포기하곤 했다. 그들이 지킨 그 무언가는 무엇이었을까. 


전쟁이 끝나면 군인들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행복해질까. 세계와의 전쟁 뒤에 사람과의 전쟁이 계속 된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외로워지지 않기 위한 전쟁이거나, 내가 누구인지 알리기 위한 전쟁일 것이다. 


'나'가 독일에서 만난 강시우라는 존재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신념으로 매우 개인적인 인생을 살아왔다고 우리 모두는 감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더 큰 세계, 자본이나, 미디어, 종교, 관습, 타인의 시선에 의해 길들여지고 세뇌되어 평준화된 인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나'라고 지칭하지만 그 '나'가 명백하게 어디에서 기원했고, 어디쯤에서 온전히 형성되었으며, 무엇을 하려고 하는 '나'인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이 남과는 다르다고 막연히 느끼고 있을 뿐이다. 사람은 남과 다른 것에서 외로움을 감각하면서도, 남과 다르게 보이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 허나 자기 자신의 것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은 외로워지게 마련이다. 이 모순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거에요. 우리가 누구였는지. 그때 왜 그랬는지. 결국 우리는 알게 될 겁니다." 

- 389쪽 -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결점들', 한 여인의 변덕과 연약함에도 애착을 갖는다. 그녀의 얼굴에 있는 주름살과 기미, 오래 입어 해진 옷과 삐딱한 걸음걸이 등이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지속적이고 가차없이 그를 묶어놓는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런가? 감각들이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있지 않다는, 다시 말해 창문과 구름, 나무가 우리 두뇌 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고 감각하는 바로 그 장소에 깃들고 있는 것이라는 학설이 옳다면,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린 우리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 391 ~ 392쪽. 벤야민이 아샤 라시스에게 읽어준 주름살에 관한 문장 중 - 


우리는 누구일까.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이 지구에서 한 철 살다가며 '나'가 누구였는지 기록해두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기록된 수많은 '나'들이 정말 그들이었을까. 백과사전에 쓰인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 노동운동가들은 정말 그들일까. 우리가 다음 세상에 우리에 대해 남길 수 있는 것은 사실 거의 무의미한 것들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런 이름자와 몇 줄의 업적보다 우리가 더 많이 남기고 갈 수 있는 것은 벤야민의 문장에서 나오듯이 무엇을 사랑한 감각들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혐오해마지 않는 대상에게도 사랑한, 그리고 사랑받은 감각은 남겨져 있을 것이다. 히틀러나, 스탈린, 박정희 같은 인물에게도 그런 감각들은 여전히 남아 이 지구 한 켠을 구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세상의 모든 혐오물들에게도 저마다 사랑의 감각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사랑해도 우리가 여전히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세계와 싸워도 오랜 시간 앞에 개인은 사라지고 만다. 다만 개인이라는 이름의 이정표만이 역사책에 남겨질 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리는 온전히 타인의 외로움을 해결해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 역시 해결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단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어둠 속에서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것과 같은 일이다. 부러진 나뭇가지 위에 사랑한 사람의 이름을 써놓는 것, 바다 아래로 사그라드는 태양을 향해 못다한 고백을 마저 늘어놓는 일, 함께 듣던 음악 말미에 눈물을 새겨넣는 일. 나로부터 우주 저편까지 사랑한 기억들을 가득 새겨놓는다면, 그것은 무수한 나를 우주 속에 심어놓는 일과 같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마음의 조각들은 남아 다음의 밤을, 어둠을 밝힐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리는 늘 마지막 같은 진심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2012. 8. 1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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