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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y 01. 2020

연한 바람이 되어, 상주 함창

<오리의 여행> B사이드

* 이 글은 사진동화책 <오리의 여행> 온라인 부록입니다 : )


상주 함창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슬로시티


연한 바람이 되어 걷다


상주 함창을 만난 건, 내 첫 번째 여행서인 <힐링로드 2 - 서사의 고향에서 문학의 풍경을 만나다>를 한창 집필 중이었던 때였다. <홍길동전>보다 100여년 앞서 쓰여진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이 쓰여진 장소라고 하는 '쾌재정'을 취재하러 가던 길에 우연히 이곳을 알게 되었다. 계절은 마침 봄이었고, 하늘은 맑았다. 상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쾌재정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지만, 나는 콜택시 대신 걸어가는 쪽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영영 이 고느넉한 풍경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오리의 여행>도 몸의 반쪽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날의 바람은 23도 즈음의 온기를 품은 실바람이었다. 햇볕이 한가득 쏟아진 평온한 마을 길을 지나니 까마득히 멀리에 산의 능선들이 보이는 대지가 나왔다. 그 위를 가만가만 걷다보니 빛과 바람에 휘감긴 채 나 역시 한 가닥의 연한 바람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가방 속에서 아기 오리를 꺼내 어깨에 올려두고 걸으며, 함께 탁 트인 하늘과 평야를 만끽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해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걷고 또 걸을 수 있을 만큼 기운이 났다. 나는 마치 <설공찬전>의 저자 채수 선생이라도 된 것처럼 옛사람의 풍류를 즐기며,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내 인생의 정류장, 카페 버스정류장


쾌재정의 취재를 마치고 다시 두 시간을 걸어 상주 시외버스터미널 쪽으로 돌아왔다. 지친 몸을 쉬어갈 겸 터미널 맞은 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의 문을 밀고 들어섰다. 조그만 읍내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멋진 공간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카페의 주인인 박계해 님이 직접 독립출판으로 펴낸 책 <나의, 카페 버스정류장>이 놓여 있었다. 잠시 책을 펼쳐 아기 오리와 함께 읽었다. 당시 좋아하던 싱어송라이터 요조 씨가 방문했던 에피소드도 한 챕터에 쓰여 있어 더 특별한 인연의 힘을 느꼈다. 




작고 단순하지만 무척 매력적이었던 사장님의 독립출판물을 보며 언젠가 아기 오리가 주인공인 책을 꼭 만들어야지 다시 다짐했다. 


이후 이 장소가 담긴 여행서 <힐링로드 2>가 나오고, <오리의 여행 1>도 출간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인사를 드리러 가지 못했다. 다시 가게 된다면 역시 봄에 가는 것이 좋을까. 봄에 두 번 찾았으니, 이번에는 가을이나 겨울이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여름에 가서 일품인 팥빙수를 먹는 것도 행복한 일이리라. 



상주 함창에는 고즈넉한 마을과 함께 옛 가야왕릉 유적도 보존되어 있다


삶에 지치고 힘들 때, 한 군데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정류장이 있다면 참 좋지 않을까. 내 여러 욕심 중 한 가지는,  상주 함창의 카페 버스정류장이 오래 그곳에 머물러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언제라도 삶에 응달이 진 날 아기 오리와 함께 다시 찾아갈 수 있도록. 


2020. 5. 1. 멀고느린구름.

사진(c) = 멀고느린구름




* 사진동화책 <오리의 여행>은 아기 오리 인형과 함께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동화로 재구성해 글과 함께 담아낸 씨디케이스 크기의 귀엽고 작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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