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시 웨스트모어랜드 <콜레트>
아름다움은 진보하는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다. 하나의 예로, 100년 전의 커피잔과 요즘 생산되는 커피잔을 비교해 보면 참담한 기분이 들 정도로 100년 전의 커피잔이 훨씬 아름답다. 문양은 물론이고, 조형미까지 압도적 격차가 있다. 밥공기를 두고 보아도 조선의 무명 질그릇이 오늘날의 명품보다 더 감동을 준다. 뉴진스의 음악도 훌륭하지만 바흐의 음악도 그에 못하지 않다. 기원전의 인물인 플라톤과 노자의 글은 요즘 나오는 어떤 철학서나 자기계발서보다 경이롭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표현을 입버릇처럼 사용하고 있다. 영화 <콜레트>에서 재현되는 120년 전의 파리는 극에 달한 아름다움과 적정한 문명이 공존하는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서의 여성의 권리가 비로소 움트고, 금기를 깨뜨리는 사랑의 변주들이 거침없이 이어진다. 미려한 건축물들이 새들이 지저귀는 수풀 속에 자리하고, 도시의 길 위로 각양각색의 자전거들이 달린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연기한 위대한 여성 소설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는 마치 자유의 화신인 것처럼, 당대의 경직된 모든 것들을 부숴버린다. 그 통쾌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눈부신 아름다움이다.
문명의 진보는 120년 전의 파리에서 멈췄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거기가 인공적 아름다움의 적정선이 아니었을까. 1903년의 파리에서 멈춘 세계를, 그 세계의 한 도시를 자전거로 달리는 상상을 해본다. 목캔디 같은 청량한 가을바람이 불고, 길 한 편에 망아지가 끄는 천천한 수레가 따각이고, 저 멀리 깨끗한 하늘에는 시베리아 오리들이 떼 지어 날며 깩깩 운다. 문고판 책을 한 손에 쥔 행인들의 눈이 반짝이고, 아이들은 모두 큰길에 쏟아져 나와 꺅꺅 웃는다. 그리고 나는 근사한 카페에서 콜레트를 닮은 여인과 마주 앉는 것이다. 콜레트는 말할 것이다.
- 사랑도 아름다움도 지금뿐이죠.
- 맞아요. 무엇도 영원하지 않죠.
- 아뇨. 모든 것은 영원해요. 한 번 빛난 것은 사라지지 않거든요. 우리는 우주가 태어난 이후의 얼마간을 여전히 관측할 수 있잖아요. 모든 것은 영원해요. 다만 사람의 마음이 흩어질 뿐인 거예요.
- 오, 콜레트를 닮은 이여. 저는 영원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은 재밌는 사람이군요.
나는 콜레트적 미소와 사랑에 빠지고, 몇 광년의 세월이 하룻밤처럼 흐르리라. 그 사이에 우주는 소멸과 탄생을 되풀이하고, 아름다운 노래와 아름답지 않은 노래가 쓰여지고, 나는 까마득한 시간 뒤에, 우리은하계 너머의 외우주를 항해하는 별의 배 속에서, 홀로 쓴 커피를 마시며 영화 <콜레트>를 재시청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영화 <콜레트>를 본 사건, 그리고 콜레트를 닮은 여인과 마주 앉았던 사건은 모두 지지난 우주의 일이므로 내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리라. 아름다움은 진보하는가.
2023. 11. 20.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