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완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 내려앉은 먼지처럼 항상 끼어 있던 이 작품을 처음 마주한 곳은 백과사전의 세계명작 코너였다. 베르테르라고 하는 한 반골 기질이 있는 젊은 지식인이 약혼자가 정해져 있는 매력적인 여성 로테를 짝사랑하고, 사랑에 실패하자 죽음을 선택한다고 하는 3류 연애 소설 같은 줄거리가 그 코너에 소개되어 있었다. 위대한 문학작품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혀 있던 청소년 시절의 내게 이 책이 권장될 리 만무했다. 시시한 로맨스 소설이라고 여겨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 뒤 방학숙제로 독후감을 제출하기 위해, 요약본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요약본은 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완전히 해체하여 아예 다른 글로 개악한 것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한 내 인상은 갈수록 고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음사에서 하는 창고 대개방 행사에 갔다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집으로 사들고 와 서가에 꽂아두었다. 아마도 "서가에 베르테르 정도는 있어줘야지."라는 허영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책을 펼쳐보게 된 것은 책이 서가에 장식된 날로부터도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올초 유난히 날이 춥던 새벽이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나는 아침부터 우울한 음악을 틀어놓고 스토브 앞에 앉아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 나도 모르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꺼내 들게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 작품이 서간문 형태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베르테르가 그의 친구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는 오래된 벗이 조심스레 털어놓는 흔하디 흔한 연애 문제처럼 마음을 기울이게 했다. 구어와 문어를 어색하게 오가는 불편한 번역이 거슬리긴 했으나, 베르테르의 진심은 껄끄러움을 뛰어넘는 힘이 있었다.
한 사람을 오래도록 사랑한 적이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일이 있지요... 라는 문장은 흔하지만 정말 그럴까. 한 사람을 오래도록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이제 드문 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참으로 흔하고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괴테의 시절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면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고, 수풀을 헤쳐 한참을 가야만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한정된 수의 사람을 만나고, 그에 자족하며 살았을 것이다.
허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지하철 플랫폼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하루 종일 수 만 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물론, 그것을 진정한 만남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으나... 우리는 한없이 만나지만, 또한 아무도 만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한 사람을 오래도록 사랑한 적이 있었다. 사랑에 성공이 있다면 그것은 한 번 사랑한 사람을 영영 사랑하게 되는 일일 것이다. 내 사랑은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허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사랑에 실패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성공한 남자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괴테 자신은 베르테르만큼 사랑에 성공한 인물은 아니었다.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수없이 사랑에 빠졌고, 다음 사랑을 위해 이전의 사랑을 멈추곤 했다. 하지만 그 매번의 사랑은 항상 목숨을 바칠 만큼의 절실함이 있었다고 하니 그는 순간순간 사랑의 성공을 꿈꾸며 산 사람이었을까도 싶다.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지정한 것은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한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A.D 1473년 무렵이니 약 11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서양인은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동아시아 한자 문명권의 경우, 개인의 명예나 정치적 대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흔한 일이었으며, 죄로 여겨지기보다는 숭고한 일처럼 여겨지는 일이 많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의 나이 23세 때인 1772년에 쓰여졌으니 중세 암흑기 신의 질서로부터는 많이 벗어난 시대이긴 했으나 여전히 자살은 씻을 수 없는 죄로 취급되던 때였다. 그러나 괴테는 되려 베르테르의 목소리를 빌려 자살을 신에게로 다가가는 구원의 방편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베르테르가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는 타살을 선택했을 것이다. 베르테르는 타살하지 않기 위해 자살한다. 괴테는 한 젊은이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묻고 있다. 타살하지 않기 위해 자살했다면 그것 역시 죄인가.
이것과 저것, 극단적인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젊은이의 우매함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괴테가 살았던 시대는 선과 악, 양 극단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던 시기가 아닌가. 선과 악, 빛과 어둠, 정신과 육체, 질서와 욕망 사이에서 항상 전자의 것을 선택하도록 길들여지던 시대에 괴테는 모든 가치를 뒤집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단지 불륜의 상대를 소유하지 못해 죽음을 선택하는 젊은이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베르테르의 선명한 자의식은 부조리한 시대와 삶을 노려보고 있었다. 젊은 베르테르를 슬프게 한 것은 로테가 아니었다. 로테가 있는 삶, 로테가 있는 시절이었다.
우리는 사랑에 성공할 수 있을까. 젊은 시절을 제법 지나온 지금의 나로서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젊은 베르테르는 자명한 실패가 두려워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아마도 베르테르의 방식으로는 사랑에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영영 사랑의 불길만을 쫓는 불나방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청춘을 사는 방법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사랑에 성공하는 방법일 수는 없다.
A.D 1772년 젊은 베르테르가 멈춰버린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괴테는 한 대상에 대한 사랑을 영속시키는 대신, 대상을 바꾸며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를 자신의 인생에서 영속시켰다. 괴테의 방식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이 좋은 답일까. 대상을 바꾸지 않고도 한 사람에 대해 영원히 온기를 지니는 사랑을 꿈꾸는 것은 정녕 꿈에 지나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사랑하고 흔들리며 나아가고 있다.
2014. 6. 8.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