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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야 Mar 08. 2022

1. 앞자리 3, 서른 살, 만성질환자

30살, 똑같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만성질환자였다.

나이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뭔가 달라지는 이유가 뭘까?
나는 항상 궁금했어.



우리나라는 유독 나이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라고 말한다.

왠지 이 나이 즈음이면 이걸 꼭 해야 한다는, 어떠한 강박 관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나이가 되었는데 인생의 방향이 늘 듣던 대로와 다르면 어딘가 이상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사실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요만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신묘한 점이 있다면, 나는 나이의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제법 기억에 남는 일이 늘 있었다는 것이다.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뀌던 때에는, 그저 여느 때처럼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신정이니 쉬지만 내일은 또 출근을 하겠지, 출근하면 또 부지런히 일하고 별 다른 것 없으면 꼭 칼퇴하고 쉴거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대학 동기인 친구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제 서른 살이라는게 뭔가 지금까지와는 기분이 조금 다르지 않냐고.

우리가 대학 입학할 때 만났으니 벌써 만난지 10년이 되어간다는 감회가 새롭다고.

다른 친구들은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서른 살을 시작으로 라디오 방송을 해 보면 어떨까?' 라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재미 있을 것 같았고, 왠지 그렇게 하면 우리의 이름이 어떤 한 브랜드처럼 넓어져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남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니더라도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는 뭔가 커다란 일의 기반이 마련될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하는 게 가능할 것만 같았다.




20대 후반, 28살에서 29살로 넘어갈 즈음의 나는 조금 많이 아팠다.

어쩌면 인생에서 유일하게 나를 긍정하지 못하고, 내 스스로도 내 주변으로부터도 나 자신을 부정하기를 끊임 없이 강요 받아 말하자면 피폐해 진 시기였다.


원래도 잔병치레가 많고 자잘하게 아프던 몸이 더 아팠다.

근 10여년 간 그래도 잠잠한 편이었던 알레르기가 어릴 때보다도 더 심하게 폭발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뻘건 두드러기가 올라 가라앉을 생각을 않고, 심지어 손바닥과 손가락 끝까지 가려웠다.

급한대로 집 근처 피부과에 가서 스테로이드 알약을 처방 받아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 몸 속 통제를 잃고 혼란만 남은 면역 체계는 속에서 소화기관까지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건지, 늘 속이 더부룩하고 변비인 것처럼 변을 제대로 못보거나 아니면 설사를 했다.


어릴 때에도 한창 심했던 시기가 있었기에 정말 위급한 경우 대처법도 알고 있었고, 그런 대처에 생각보다 익숙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지만 그저 온몸에 가리지 않고 난리가 나니 괴로웠다.

잠을 자다가도 어찌 할수 없는 가려움에 잠에서 깨 투덜투덜 짜증을 내면서 소론도라는 이름의 스테로이드를 두 알 집어먹고 어떻게든 다시 잠을 청했다.

때로는 약을 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어 속으로 몸 속 면역세포들에게 욕짓거리를 할 때도 있었다.

급성으로 마구 올라와 얼굴과 두피까지 붉게 부풀어 오른 부종으로 가득 뒤덮이고 호흡까지 답답해짐이 느껴지면 절대 의식은 놓고 싶지 않다고 절박하게 속으로 되내이며 정신줄을 붙들고, 엄마에게 전화하고 응급실에 갔다.


몸 상태가 늘 그러니 항상 짜증이 솟구쳐 있고, 예민하고, 모든게 불편했다.

평생 안고 살아 와도 스스로를 아픈 사람이라고 인지한 적이 없는데, 이 시기만큼은 "나 아파, 힘들어, 진짜 죽겠어" 라고 생각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같이 병드는 법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 전부터도 어딘가 살짝 불편하고 아프던 마음이 몸까지 아프자 드디어 무너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멘탈만큼은 단단해서 웬만해선 부서지지 않는다고 언제나 장담하는 나였지만, 아무리 단단한 바위도 계속해서 거센 바람과 파도를 맞으면 깎이고 깨지고 구멍이 뚫리는게 자연의 이치였다.


일상을 이어가던 도중 머릿속에 '삶이 싫다.'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뭘 하든 업무를 할 때마다 '또 혹평일텐데 이제 내가 싫다.'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늘 보는 주변의 풍경들이 왠지 굉장히 무기질적으로 보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채도가 낮아졌다.


대충 이런 느낌의 차이였다. 실제로 겪어보면 제법 무섭다.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느끼는 것은, 그래도 내 마음이 기본적으론 튼튼하고 유연하다는 점이다.

인지한 순간, 이건 정상이 아니고 어딘가 아픈 것이라고 깨달았고 그 주 주말에 바로 집 근처 정신건강의학과로 달려가 일종의 SOS 신호를 쳤다.


주말을 빌려 병원에서 우선적으로 약을 처방 받아 먹고, 다시 세상의 채도가 조금씩 돌아오는걸 느꼈다.

그리고 돌아오는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퇴사하겠다고 다니던 회사에 통지했다.

당장의 휴식도 필요했지만 동시에 이렇게까지 된 환경에서 바로 벗어나는 것이 먼저라는 판단이었다.

의사선생님도 이 부분은 잘했다며 긍정해 주셨다.


이것이 내 프로필에도 적혀있는 2019년 5월, 우울증의 시작이었다.




거기서 끝이라면 좋았을텐데, 내 삶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1년만에 또 추가되었다.

우울증으로 꾸준히 다니던 병원에서 받은 또 다른 진단, 성인ADHD였다.

우울증 진단 후 거의 딱 1년이 되던 시기, 2020년 4월이었다.


그 때에는 우울증은 거의 나아져서 유지치료를 하는 중이었고, 새로이 등장한 ADHD라는 이름에 나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던 것 같다.


아! 환경이 바뀌고 치료를 받아도 불편했던 부분은 이것 때문이었구나.

아! 어릴 때부터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아!
나를 조금 더 알게 되었어!
이렇게 편안하고 기쁠수가!


누군가는 그게 어떻게 기쁜 일이냐고, 이상하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기쁜 일이고, 좋은 일이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고 스스로 컨트롤하기 더 나은 환경이 되었는데, 기쁜 일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리고 2021년 30살, 나이의 앞자리가 3으로 바뀐 해에 드디어 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알레르기도, 주요우울장애도, 성인ADHD도, 모두 평생 같이 가야 하는 친구들이다.

이들은 모두 만성적이고, 약을 먹고 생활 관리를 하면서 충분히 나아진 것으로 보여 잊고 살다가도 주변 환경이나 내 컨디션, 피로도에 따라서 갑자기 나에게 다시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는 것들이다.


만성질환자.


그것이 나에게 새롭게 주어진 타이틀이고, 정체성이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알레르기를 관리해 왔듯이, 다른 것들도 그렇게 해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일상을 살면서 그걸 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튼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렇게 살아간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어느 날, 나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만났다.


아!

앞자리 3은 정말 역동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나는 20대 후반을 건너며 한꺼풀 날아갔던 활력을 다시 찾고 있었다.

나, 그리고 내 주변 환경의 변화들로 인하여.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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