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햇살이 따사로운 토요일 오후, 늘 걷던 익숙한 천변을 걷는다. 겨울의 끝자락답지 않게 포근한 공기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이 거센 바람이 아닌 다정한 햇살임을 증명하듯, 집에서 입고 나온 두툼한 패딩을 사람들 손에 들게 만든다. 앞서가던 소녀가 자전거를 멈춰 뒤돌아 손을 흔들면, 그 너머엔 아이를 눈에 담던 아빠의 안도 섞인 미소가 머문다.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마른 천변 위로 이름 모를 풀들이 자유롭게 고개를 내미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오후다.
주머니 속 휴대폰에서는 오랜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난 대학 시절 인연들과의 대화가 활발하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며 살아가는 이야기에 미소 짓다가, 문득 손끝에 스치는 바람의 감촉이 다르게 다가왔다. 이 바람은 40년 전, 전주교도소의 높은 담장 안에서 20년 20일이라는 수형 생활의 마지막을 보내던 신영복 선생이 그토록 갈구했던 그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이 '발걸음'과 '안부'가 누군가에게는 생을 건 사무친 그리움이었음을 떠올리며, 그의 기록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다시 펼쳐 든다.
책을 읽으며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왔던 지점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이야기인 <청구회 추억>이다. 1966년 봄, 서오릉의 화사한 햇살 아래서 진달래꽃을 건네며 시작된 여섯 소년과의 인연은 아이들이 살던 서대문 현저동의 거친 벌판으로 이어진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 아이들을 만나 10원을 저금하고 삶의 이야기를 나누던 그 서대문 벌판은, 선생에게는 지키고 싶은 순수의 영토였다. 그러나 그 벌판의 끝에는 서대문 형무소의 차가운 담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결국 선생은 아이들과의 약속 장소로 향하던 길에 그 담장 안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이름 모를 지방의 어느 학교의 교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82년, 시를 읽고 감상을 이야기하던 교사들의 모임을 간첩단으로 조작했던 ‘오송회(五松會) 사건’. 신영복의 ‘청구회’가 권력의 눈에 불온한 조직으로 낙인찍혔듯, 그 지방의 교정에서도 ‘사람의 향기’는 ‘용공의 낙인’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국가권력이 한 개인과 집단의 삶을 얼마나 철저히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 두 사건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진실의 얼굴을 드러냈다. 국가의 사과와 배상금 일부로 만들어진 ‘민주 장학금’을 보며, 아이들이 ‘민주라는 이름을 가진 선생님이 주시는 거냐’며 천진하게 물었다던 해프닝은 이 비극의 마침표치고는 꽤나 다정하다. 권력은 한 시대를 더럽히고 개인을 파괴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이 끝내 지키려 했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일상의 웃음’까지는 박탈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닌, 지금 발 딛고 선 이 교정의 이야기로 읽게 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C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29쪽-
이 대목은 책의 표지에도 적혀 있을 만큼 유명한 구절이지만, 나 역시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일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선생의 고백은 단순히 육체적 더위를 견디는 고통을 넘어, 타인의 존재가 곧 형벌이 되는 철학적 물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윤리’와, 옆 사람의 온기가 나의 생존을 위협하기에 시원하고 싶어 하는 ‘생물학적 본능’의 처절한 충돌이다. 또한, 우리의 미움이 상대의 성품이 아니라 그가 처한 황폐한 조건에서 기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성의 상실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아프게 웅변한다.
하여, 선생이 목도한 ‘여름 징역의 비극’은 사르트르가 말한 '타인은 지옥'이라는 선언의 가장 처절한 현시다. 겨울에는 서로의 생존을 돕던 동지가 여름이라는 조건 아래서는 오직 나를 파괴하는 '37도의 열덩어리'로 치환된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있음' 자체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된다는 사실. 그 속에서 인간은 영혼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배척해야 할 '물질'로 전락한다. 타인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물체로 인식하는 순간, 인간성은 상실을 넘어 황폐화의 길로 접어든다. 이것이 선생이 0.5평의 방에서 마주한, 공간의 결핍이 낳은 가장 슬픈 괴물이 아니었을까.
다시 생각해보면, 오늘 내가 천변에서 만난 이들의 행동을 보며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성품이 훌륭해서가 아니었다.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적 자유’가 내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2월의 저 따사로운 햇살이 어느 계절, 특정 공간 속의, 누군가에게는 서로를 밀어내야만 하는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그 서늘한 진실을, 나는 포근한 산책길 위에서 비로소 배운다.
타인의 존재가 고통이 되는 ‘여름 징역’의 황폐함 속에서도 선생은 끝내 인간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얘기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기록된 이야기는 아니나, 훗날 선생이 다른 저서 《처음처럼》에서 언급한 ‘목수의 그림’ 이야기는 그가 감옥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어떻게 인간성을 복원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노인 목수가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집 그림에서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충격은 집을 그리는 순서였습니다. 주춧돌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맨 나중에 지붕을 그렸습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과는 그 순서가 반대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집 그림은 집 짓는 순서와 같았습니다.
책과 교실과 학교에서 생각을 키워온 우리들과는 반대였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온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중에서 -
“세상에 지붕부터 그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꾸짖던 목수 노인의 이야기는 지식인의 관념적 오만함을 향한 준엄한 질책이었다. 지식인(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인류애’나 ‘민중’이라는 화려하고 완성된 형태인 지붕을 먼저 그리지만, 정작 여름 징역의 37도 열기 앞에서는 옆 사람조차 증오하게 되는 초라한 밑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선생은 이 지점에서 결단을 내린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관념적인 지붕을 과감히 내려놓고, 당장 내 피부에 닿는 타인의 온기와 고통이라는 주춧돌부터 인간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타인을 ‘열덩어리’로 보게 만드는 황폐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비참한 현실을 집을 짓기 위한 가장 정직한 기초로 삼으려는 처절한 노력이었다.
이 대목은 교정에서 아이들을 마주하는 나에게도 뼈아픈 성찰의 지점이 되었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교직의 오랜 시간,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교실에서 늘 ‘지붕’부터 올리는 목수일 때가 많았다. 수업을 설계할 때, 내 질문에 즉각 반응하고 수준 높은 답을 내놓는 상위권 학생들의 속도에 맞춰 '지붕'을 먼저 그려놓곤 했다. 화려한 지붕이 완성되면 수업이 성공적이라고 착각했지만, 정작 그 지붕 아래서 기둥조차 세우지 못한 채 소외된 아이들의 '주춧돌' 같은 현실은 외면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위주로 한 설계는 지식인의 관념적 유희일 뿐, 삶의 무게를 지탱하는 진짜 교육은 아니었다. "세상에 지붕부터 그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목수 노인의 호통은, 교실 뒷자리에 앉아 묵묵히 제 몫의 무게를 견디는 아이들의 발밑부터 다시 살피라는 준엄한 질책으로 다가왔다. 교육이란 지붕의 높이를 뽐내는 일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주춧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독이는 일이어야 함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필재가 있는 사람의 글씨는 대체로 그 재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견 빼어나긴 하되 재능이 도리어 함정이 되어 손끝의 교(巧)를 벗어나기 어려운 데 비하여, 필재가 없는 사람의 글씨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기 때문에 그 속에 혼신의 힘과 정성이 배어 있어서 ‘단련의 미’가 쟁쟁히 빛나게 됩니다. (중략)
결국 서도는 그 성격상 토끼의 재능보다는 거북이의 끈기를 연마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글씨의 훌륭함이란 글자의 자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묵 속에 갈아넣은 정성의 양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평가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리라 생각됩니다. (중략)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이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육중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02쪽-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무기수의 이름으로 살았던 선생에게 글쓰기란 어떤 의미였을지에 대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았던 정겨운 서화 속의 글씨도, 심지어 소주병의 ‘처음처럼’ 글씨도 모두 선생의 작품이기에, 선생에게 서예란 기한 없는 수형생활을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중요한 수단이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발췌한 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선생에게 서예는 단순한 조형의 기술이 아니었다. 그는 타고난 재능이 오히려 독이 되어 손끝의 기교에 머무는 것을 경계했다. 무기수로서의 절망적인 시간을 견디게 한 것은 토끼의 영리함이 아니라, 묵(墨) 속에 정성을 갈아 넣는 거북이의 우직함이었다. 온몸의 힘을 실어 획을 긋는 ‘단련의 미’는, 화려한 지붕을 올리기보다 보이지 않는 주춧돌을 깊게 박는 목수의 정직함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대목은 요즘 붓펜으로 유명한 시와 소설의 한 대목, 인생의 경구, 고전의 한 대목을 ‘필사’해 보는 나에게 뼈아픈 성찰을 던진다. 부끄럽게도 나의 손끝에는 선생이 경계했던 ‘손끝의 교(巧)’조차 채우지 못한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문장의 의미를 온몸으로 받아내기보다 빨리 써서 채워 넣으려는 속도의 관성. 그것은 어쩌면 효율과 성과만을 쫓던 나의 관념적 습관이 필사의 시간마저 오염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 본다. 선생이 말한 ‘우직함’이란 단순히 느린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고독한 단련임을 한 번 절감해 본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선생의 글쓰기가 갖는 또 다른 본질은 담장 너머와의 ‘소통’이다. 무기수에게 편지글은 자신이 여전히 누군가의 가족이며, 살아있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선생은 글씨의 훌륭함이 자획이 아니라 “묵 속에 갈아 넣은 정성의 양”에 있다고 말한다.
좁은 엽서 한 장에 담긴 안부는 단절된 세상으로 보내는 필사적인 연결의 몸짓이었다. 수양의 붓길이 내부로 향하는 깊이였다면, 세상을 향한 편지글은 외부로 향하는 너른 길이었다. 나를 세우는 수양의 힘과 타인에게 가 닿으려는 소통의 의지. 이 두 기둥이 있었기에 선생은 20년 20일이라는 가혹한 세월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필사를 하며 조급함에 발을 동동거리는 나의 모습 위로, 묵묵히 붓을 들어 자신을 세우고 세상을 불렀던 선생의 우직한 뒷모습이 겹쳐진다. 독서를 통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이런 실천적이며 통렬한 깨달음이란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이 책은 단순히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한 수감자의 기록이 아니다. 기약 없던 20년 20일이라는 예견되지 않은 어둠을 견뎌낸 인간의 위대한 수양록이다. 상아탑의 화려한 이론에 갇혀있던 ‘관념적 지식인’이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타인의 고통과 부대끼며 ‘실천적 철학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좁은 엽서와 담배갑에 빼곡히 적어 내려간 가족에 대한 절절한 안부는 단절된 공간에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인간애의 증거이며,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자유와 일상이 실제로 얼마나 경이로운 축복인지를 세밀하게 일깨워준다. 선생의 문장들은 독자로 하여금 타인을 배척해야 할 ‘열덩어리’가 아닌, 함께 어깨동무해야 할 ‘숲’으로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세워온 삶의 설계도들을 되돌아 보았다. 성취와 효율이라는 화려한 기와를 올리기 위해 정작 가장 낮은 곳의 ‘주춧돌’들을 외면했던 시간들, 그리고 필사를 하며 느꼈던 조급함은 내 사유가 여전히 ‘손끝의 기교’에 머물러 있음을 아프게 깨닫게 해 주었다.
선생이 묵(墨) 속에 정성을 갈아 넣으며 우직하게 자신을 단련했듯, 나 역시 관념의 매몰 속에서 벗어나 내일의 일상을 정직한 실천의 땀방울로 채워가야 함을 배운다. 이제 나에게 독서와 필사는 단순히 문장을 흡수하고 옮기는 행위가 아니라, 내 삶의 비어있는 주춧돌을 하나씩 놓아가는 단단한 단련의 시간으로 바뀌어 나가야 할 것이다.
삶의 방향이 흔들리거나, 타인과의 관계가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 이 책을 펼쳐 보기를 권한다. 속도와 경쟁이 강요하는 ‘지붕’의 무게에 눌려 정작 나 자신의 ‘주춧돌’이 무엇인지 잊고 사는 이들에게, 선생의 문장은 서늘하지만 따뜻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또한, 비워진 마음을 정직한 정성으로 채우고 싶은 이라면, 20년의 세월을 응축한 이 옥중 서간을 통해 삶을 지탱하는 진정한 힘이 어디서 오는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에 바람은 여전히 불고 어떤 식으로든 삶은 계속되겠지만, 이 책을 읽기 전과 후의 풍경은 결코 같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며 기꺼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