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마음 없이
난 미처 책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몰랐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서점이 지겹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그와 별개로 서점이 지겨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껏 산 책을 읽지도 못하는 내가 애처로울 뿐. 그렇다고 책을 사지 않을 것도 아니기에 이용진 인터뷰를 찾아봤다. 하기로 한 건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용진을 검색한 거였는데 그의 단순명료한 대답들에 되려 생각이 깊어졌다. C급이어도 괜찮고, 더 잘되고 싶은 욕심도 없고, 웃기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 마음으로 당하는 개그를 연구하는 코미디언.
"다 함께 잘됐으면 좋겠다. 제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홍보해주고 싶다."는 용진의 말에 GQ가 "용진 씨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냐"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런 거창한 사명감은 아니고요. 제가 할 일은 첫 번째가 웃기는 것, 두 번째가 재미있는 사람들이랑 좋은 케미를 이루는 것, 그 다음 세 번째가 재밌는 사람들을 알려주는 거예요. 함께하면 재미있으니까 하는 것뿐이에요."
정말 솔직하고 타당한 말이었다.
어려서부터 “용진이가 가장 웃기지”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아이는 한 학년 아래 가장 웃겼던 후배와 함께 아이돌 같은 개그맨이 되었다.
무슨 일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난 무얼 그렇게 하고 있을까. 겉으로 보기엔 난잡해도 멀리서 보면 한 지점에 고여있다. 열아홉엔 무슨 일이 있어도 만드는 사람이 되리라 결심했다. 포트폴리오 학원에서 언니들과 생각을 나누며 두루뭉실하던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일에 난생 처음 희열을 느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걸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그 기분. 결과물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받는 느낌. 스스로도 깜짝 놀랄만큼 기발한 생각을 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번뜩이는 재치만큼이나 끈질긴 의지도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겐 그런 것이 부족했다.
어쩌면 훨씬 오래전부터 만드는 사람을 꿈꿨던 것 같다. 꾸준히 가시지 않는 갈증 덕에 늘상 무언가를 좋아했다. 책이든 영화든 아이돌이든 친구든. 정말이지 무엇이든 쉽게 좋아하는 아이였다. 좋아하는만큼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것 중에 잘할 필요가 없는 것도 많았다. 어릴 때는 잘한다는 마음 없이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과를 못그리면 스무개씩 그렸고, 손이 악보를 따라갈 때까지 피아노를 연습했다. 죽기살기로 하지 않았으나 적어도 잘 못한다는 말로 그만둔 적은 없었다. 못하면 될 때까지 했다. 그 중에는 비교적 쉬웠던 것도 있고 어려웠던 것도 있다. 그냥 하다보면 나아졌다.
엄마는 자기가 가장 싫어했던 일 두 가지를 무엇보다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어 말하기와 산수. 못해서 더 열심히 했고, 자연스레 못하는 걸 잘하게 되었다. 고전문학과 피아노를 좋아했던 문학소녀는 이제 엑셀을 두드리며 책 한권 읽을 새도 없이 살아간다. 엄마가 선택한 삶이다. 난 그 말을 듣고 분명히 잘하는 걸 더 잘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 마음 무색하게 못하는 걸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예전부터 그랬다. 못할수록 오기가 생겨서 더 잘하고 싶었다. 욕심이 너무 많다.
지금 점을 찍는다면 어디쯤일까. 내년에는 뭐라도 확실해질거라고 알려주면 좋겠지만,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계속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큰 욕심 없이도 할 후 있다면 내 길은 그쪽에 있을까.
세상에는 얼떨결에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사진을 찍다가 책을 만들고 있는 사람, 책을 추천해주다가 책방을 낸 사람, 회화를 하다가 사진을 찍는 사람,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아트북 전문 출판사를 차린 사람 등등. 오늘 본 사람들만 해도 이 정도인데, 정말로 그 사람들이 하고자 했던 일은 뭐였을까. 그 때 어떤 포기와 선택을 했던걸까. 사람들이 참 다양하게 살고 있다. 그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된다.
2022년 3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