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 바나나『바다의 뚜껑』
"아무튼 한 번 돌아가 보자, 그래, 이렇게 빙수를 좋아 하는 걸 보면 그게 천직일지도 모르지. 어렸을 때부터 빙수를 유별나게 좋아했다. 얼마 아빠 몰래 하루에 세 번은 먹곤 했다. 대학 시절에는 빙수 기계를 사들여 놓고 방에서 얼음을 사락사락 갈아 겨울에도 먹었을 정도다. (...) 미술 대학에 다니면서 무대 미술을 공부했지만, 결국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사람들에게 정말 자랑할 수 있는 건 빙수를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다는 것 정도다. 그러니까 빙수 가게를 하자."
요시모토 바나나『바다의 뚜껑』민음사 20쪽 (2016)
자취방에서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면서 이직 준비를 하다가 집밥이 무진장 먹고 싶다는 핑계로 고향인 시골로 도망쳤습니다. 참 한심한 핑계 같지만, 진짜 이유는 더 한심했습니다. 좋은 직장의 사원증을 건 친구들 앞에서 초조함과 불안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몸짓을 힘껏 부풀리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곧 터질 것만 같아서 도망친 것입니다.
대도시에서 시골로 도망치면, 색감 예쁜 과일이 주렁주렁 널려있고 엄청난 자연이 펼쳐질 것 같지만, 제가 돌아온 고향은 먼지가 잔뜩 묻고 잿빛의 인화 사진 같았습니다. 낡은 간판은 덜렁거리고, 한낮인데도 셔터가 내려진 가게들. 지나가는 사람도 잘 없습니다. 『바다의 뚜껑』에서 마리가 돌아온 마을도 비슷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네에는 길 양쪽으로 문 닫은 가게가 즐비하고, 오후에도 셔터를 내리고 있는 곳이 참 많았다. 그런 가게들이 햇살 속에 하얗게 뜨겁게 반짝거리는 광경은 정말 폐허 같아서, 간혹 열려 있는 가게가 오히려 스산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21쪽
스산하고 쇠락한 마을이지만 대도시의 수많은 사람과 비교하며 지쳐있던 제게 도망칠 장소로 딱 맞긴 했습니다. 하지만 도망의 핵심은 후일을 도모하는 것. 항복하지 않고 도망쳐 다음 계책을 연결하려는 것이 병법 삼십육계의 마지막 방법입니다. 삼십육계 줄행랑은 도망치는 게 부끄럽기는 해도,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살아남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생깁니다. 자기소개서에 쓰기 애매모한 것들이, 점수로 측정되지 않던 것들이, 내 일을 만들 때는 다재다능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무대미술을 전공했던 마리가 능숙하게 빙수 가게를 꾸밀 수 있었던 것처럼요.
마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재료로 빙수를 만듭니다. 일본에서 빙수는 보통 빨강, 파랑, 초록 시럽을 뿌립니다. 흰색(사탕수수)과 노랑(감귤) 시럽은 잘 없습니다. 마리의 가게에 온 꼬마아이도 빨강시럽이 없다며 울면서 가게를 나갑니다. 보통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섭습니다. 이상한 눈으로 보거나, 쓸모없는 취급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럴 때 흔들리지 않는 방법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에게 계속 묻는 수밖에. 도시의 삶이든, 시골의 삶이든, 보통의 삶이든, 보통이 아닌 삶이든, 정답인 삶은 없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면 그 누구도 틀렸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저도 『바다의 뚜껑』을 펼치며 시골의 삶이 맞다고 환상을 심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저에게 도망치기에 좋은 장소였지만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 솔숲에 빙수 가게는 없었어. 그리고 이 인형도. 얼마전 까지는 이 세상에 없었지. 내 머릿속에서만 살아 있는 생물이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존재하고 있잖아. 어쩌면 대단한 일인지도 몰라." 나는 생각했다. 의도하고, 자긍심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고, 머리를 써서 여러 가지로 고민하면 정말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 지금까지 형태도 흔적도 없었떤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그걸 유지할 수 있다. 인간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누가 없애 버리려 하거나, 일부러 획일화하려 해도, 아무리 억압해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 그런 힘을. 148쪽
중요한 것은 나에게 이 삶이 맞을지, 저 삶이 맞을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상상력. 상상력이 없으면 막연한 환상을 품게 됩니다. 도시에 가면 분명히 무언가 있다고 믿었던 스무 살의 저처럼요.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어딘가로 도망쳐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되고 싶은 모습과 살고 싶은 모습을 상상하고, 또 상상해야 합니다. 상상이 현실이 되면 내 발이 딛고 있는 곳이 어디든 분명 나에게 많은 것을 내어줄 겁니다.
월요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이 삶이 맞을지, 저 삶이 맞을지 생각해볼 수 있는 상상력이 있습니다. 오늘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다의 뚜껑』을 읽고 도쿄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빙수가게를 연 마리의 삶을 상상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