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반스와 미키17의 행방불명

에리히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by 박세잎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내어주고,살아가기 위해 이름을 되찾는《미키17》


에드워드 애슈턴 작가의 SF소설 『미키7』을 원작으로 한 봉준호감독의 영화《미키17》을 봤습니다. 저는 《미키17》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센과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두 주인공 모두 살아남기 위해자신의 '이름'을 내어줬고, 살아가기 위해 다시 '이름'을 되찾아야 하는 플롯을가지고 있습니다. 센은 치히로가 되었고, 미키반스는 미키 17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름이 있어야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삽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나의이름이 호명됨으로써 타인과 구별됩니다.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이름을 미키 반스는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버립니다. 살아가게 하는 이름을 살아남기 위해 버린다니, 오류가 있는 문장으로 보입니다. '살아가다'와 '살아남다'의차이를 설명하면 문장에서 오류를 제거할 수 있을까요. 오류가 있는 문장을하나 더 가져와봅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넋을 놓은 사람에게 '산 사람은살아야지'라고 말합니다. 이미 살아 있는 사람에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어서 추스르고, 밥도 먹고, 일도 하고, 웃고, 울며 사람답게 살아가줬으면 하는애원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한 사람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살아남는것은 사람의 형태만 남겨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채업자에게 협박을 받고 있는미키 반스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우선 살아남아야 가능하니까요.



삶을 사랑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름을 버린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만, 사실 미키 반스는 너무나 쉽게 이름을 버렸습니다. 이름을 버리고, 1이라는 숫자를 부여받고 사람의 형태를 가진 소모품이 되었습니다. 소모품이 된 미키는 쓰이고, 버려지고, 쓰이고, 버려지고의무한 반복입니다. 미키 17까지 소모품으로써 살아남았지만, 사람으로서는살아가지는 못했습니다. 미키반스가 쉽게 이름을 버리고 소모품이 된 이유에는 사채업자의 협박 이전에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한 무력함이 있습니다.그래서 미키의 선택을 한심함이 아니라 안쓰러움으로 지켜봅니다. 우리도 삶을 사랑하지 못해서 이름을 버리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나의 이름을 온전하게 지켜내는 일입니다. 하지만 먹고살다 보면 이름을 지켜내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먹고살기 위해서는 나의 이름보다 내가 무엇을 생산할 수 있는지, 나의 쓸모가더 중요합니다. 나의 이름 세 글자로는 나의 존재가 설명되지 않는 초라함이있습니다. 사람의 형태뿐인 소모품이 된 듯한 무력함이 있습니다. 초라함과 무력함이 뒤엉킨 우리는 삶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미키가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려면 미키 17도, 18도 아닌 미키 반스,자신의 이름을 되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 않는'삶'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소련과 미국의 냉전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향해 내달리고 있을 때 ‘삶에 대한 사랑’을 호소한 정신분석학자 에리히프롬이쓴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읽어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의 이름보다 내가 무엇을 생산할 수 있는지, 쓸모를 최우선으로 하는 산업화 사회에서 어떻게 삶을 사랑하고, 나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냐는 질문에에리히 프롬은 말합니다


삶을 다시 사랑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대량생산 시스템과 기술 성과를 포기해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위험을 깨달아야하며 물질적 사물을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되돌려놓아야 한다. 더 이상우리 자신을 사물로 바꾸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사물의 주인으로만 존재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43쪽


에리히 프롬은 사람을 사물로 환원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는 능력'을다시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눈을 뜨기만 하면 모든 것을 볼 수 있는데 '보는능력'이란 무엇일까요?


"순전히 개념으로만 인지할 경우 그 나무는 개성이 없으며, 그저 '나무'종중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나무가 추상의 대변인에 그치는 것이다. 하지만완전하게 인식할 경우 추상이 없다. 나무는 완전한 구체성과 더불어 그것만의유일성을 띠게 된다. 그럴 경우 세상엔 나와 인연을 맺고 내가 바라보며 응답하는 이 한 그루의 나무만 존재한다. 그 나무가 나의 고유한 작품이 되는것이다.『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129쪽


소모품이 된 미키가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건미키를 제대로 봐주는 나샤 덕분입니다. 나샤는 미키가 미키 1부터 미키 18까지 수십 번 소모품이 될지라도 그 안에 있는 진짜 사람, 미키 반스를 봅니다.나샤는 미키 17과 미키 18 모두 포기하지 못합니다. 나샤에게 그 둘 모두 미키반스니까요. 사람을 사물로 보는 사회에서 ,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능력' 필요합니다.


보는 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보는 능력은 '어떤 것을 얻어내려고하지 말고 그것은 진정으로 바라'(44쪽) 볼 수 있는 고요함 속에 있습니다.우리는 고요할 때 나를, 그리고 타인을 제대로 봅니다. '나는 쓸모없는(있는)사람이야, 너는 쓸모없는(있는) 사람이야'로 나와 너를 보았던 눈을 감고, 내가진정으로 감탄하는 것, 집중하는 것,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으로 나와너를 향해 눈을 떠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요?




봉준호 감동의《미키17》를 보고, 삶을 사랑하지 못해 이름을 버려야만 했던 때가 떠올라 에리히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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