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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Aug 10. 2019

‘녹번동 도원극장'의 추억

극장과 관객 모두 매너가 없어서 오히려 양쪽 모두 편했던 그런 시절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행한 '영화천국' vol. 37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 <무사>의 한 장면. 사막을 떠돌던 사람들은 버려진 성 안으로 들어간다. 진립과 여솔, 최정을 비롯한 무리는 이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람불화가 이끄는 몽고군과의 전쟁이다. 공성과 수성의 싸움이 오고가는 가운데, 성 밖으로 나온 최정장군은 적을 향해 질주한다. 바로 그때, 맑고 청량한 느낌의 멜로디가 그들의 혈투를 감쌌다. 연달아 울리는 종소리라고 해야 할까. 귀에 익은 멜로디 같기도 하지만, 뭔가 이 장면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했지만, 영화 속 남자들의 목숨을 건 싸움은 예상치 못한 음악과 함께 기이한 매력을 뿜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 들리는 여자 성우의 목소리. 잠깐, 이건 광고 멘트 아닌가?


그때서야 극장의 불이 켜졌다. 함께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안경을 쓴 아저씨가 스크린 앞으로 나섰다. 별일 아니라는 듯, 일이 귀찮게 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게 사운드가 엉켜서….” 이야기의 골자는 간단했다. 계속 보실 분들은 계속 보시라. 환불은 없다. 지금 나갈 사람은 나가라. 환불해주겠다. 상식적으로는 끝까지 보든, 안보든 다 환불해줘야 할 것 같은데 아저씨는 조건을 내걸었다. 나는 고민했다. 엔딩까지 남은 시간은 약 20여분. 그냥 볼 까, 아니면 돈을 받고 나갈까. 그 와중에도 나는 분명 누군가가 영화도 다보고 환불도 받을 수 있도록 항의를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몇몇 사람들이 극장을 나갔고, 또 몇몇 사람이 혼자 괜한 성질을 부릴 뿐, 대놓고 항의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마저 영화를 보았다. 화장실이 급했던 나는 돈을 받고 나갔다. 2001년 9월의 어느 날, 은평구 녹번동에 위치한 도원극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의 아니게 영화에 삽입된 맑고 청량한 음악은 당시 <무사>의 투자배급사였던 제일제당의 시그널이었다.


아마도 전국에 있던 대부분의 동네극장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 거다. 지금 멀티플렉스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극장 측은 환불도 해주고, 할인권도 주면서 관객을 달랜다. 하지만 약 14년 전, 그때 만해도 이런 일 정도 관객은 광분하지 않았고, 극장업자는 그냥 멋쩍어했다. 있을 수도 있는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였다고 할까? 어차피 그 시절 동네의 동시상영관은 한 번 들어가면 원할 때까지 안 나와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던 곳이었고, 영화를 보다가 담배를 펴도 되던 곳이었고, 종종 맥주를 사들고 와셔 마셔도 상관없는 곳이었으니까. 그만큼 그 시절 동시상영관에서는 모두가 조금은 느긋하고 게으르게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지금 와서 그때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다만 늦게 와서 다리 접어달라는 관객에게 눈치주고, 머리 치워달라고, 소리 내지 말라고, 발로 차지 말라고 경고하는 지금의 극장보다 좀 더 마음이 편하기는 했었다.


P.s 이곳에서 한국 동시상영 역사에 기록될 만한 프로그래밍을 경험하기도 했다. 원래 동시상영은 이제 막 개봉관 상영을 끝낸 메인스트림 영화와 거의 바로 비디오시장으로 직행할 영화들을 1+1로 묶는다. 그런데 1997년 그때 친구와 함께 찾아간 극장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와 대니 보일의 <트레인 스포팅>이 함께 묶여있었다. 어차피 오래 앉아 있어도 뭐라하지 않는 곳이라, 2번씩 봤다. 


'에디터K의 이상한 장면' 이란 이름으로 유튜브를 하고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콘텐츠로 조회수를 올리고, 개인적으로 찍은 영상으로 라이브러리를 채웁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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