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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Jun 02. 2019

연애도 이미지트레이닝을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글쎄...

그녀는 요즘 “이제야 내말을 좀 알아듣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 우리는 10년 넘게 만났다. 이제라도 조금씩 알아 들으니 다행이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왜 10년의 시간이 필요했는 지는 의문이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 그보다는 연애가 원래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연애 초기의 나는 오늘은 그녀와 어디서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녀의 반응이 좋은 날도 있었다. 사실 안좋은 날이 더 많았다.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나는 그녀를 어떻게 해야 더 편안하게 해줄까를 생각한다. 오늘의 일정상 식사하기 편한 곳을 찾는다. 그녀가 하이힐을 신고 나왔으니,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동선을 찾는다. 뭔가 신경질적인 모습이 보이면 식당으로 이끌고, 피곤해 보이면 어깨와 목을 주물러 준다. 10년을 함께한 이상 더이상 과거와 같은 모험심은 없다. 다만 함께 하는 시간은 그때보다 더 편해졌다.


지금 알고 있는 걸 10년 전에 알았다면, 우리의 10년은 더 행복했을까? 행복했겠지만,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야구나 축구처럼 연애가 상대를 분석하고 그에 맞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니니 말이다. 야구가 좋아서 사회인 야구를 하는 나의 야구실력에 빗대어 보면 더더욱 그렇다. 올 시즌 나의 사회인 야구 스탯은 1타수 무안타. 0.000이다. 1경기에 출전해 팀이 완전히 이기고 있을 때 백업으로 들어가 타석에 섰고, 2루 땅볼을 쳤다. 타격이야 눈에 들어오면 휘두르다가 맞는다고 쳐도, 수비는 더 문제다. 지금까지 꽤 여러 경기에 나가봤지만, 내가 플라이볼을 잡아 아웃시킨 경우는 딱 한 번뿐이었다. 타구가 날아올 확률이 적은 우익수를 맡기 때문이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사실 내가 잘 못 잡는다. 머리 위의 공을 보며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는 강박이 먼저 앞서는 경우가 많다. 연애가 스포츠 같은 거였다면, 10년 전의 나는 이제 막 야구를 시작한 지금의 나와 같았을 거다. 잘하려고 하다가 망쳐버리는 연애. 그때의 나도 우리의 연애에 찾아올 온갖 변수들을 상상했겠지만, 아무 소용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녀에 대한 이미지 트레이닝이 수월해졌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말 그대로 상상의 훈련이다. 실제 경기 도중 일어날 수 있는 변수들을 최대한 예상해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미리 가늠하는 것이다. 프로선수들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변수에 대응하는 반응속도를 높이고, 그러면서 자신감을 얻는다고 한다. 프로야구 경기 전 보도되는 사진 중에는 타자가 배트를 들고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한 것들이 많다.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지금 그들은 상대팀 투수가 던져올 구종을 상상하며 맞춰보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중이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추신수는 자신의 책 <오늘을 즐기고 내일을 꿈꾸다>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경기를 하기 전에 내 훈련 정도나 몸의 상태에 따라 그 날 있을 경기가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그려진 상황이 실제 경기에서 일어나기도 해서 신기한 적이 최근에 몇 번 있다. 이것은 내가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변수를 최대한 감지하고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하면 김성근 전 한화이글스 감독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그날 경기를 9회말부터 역순으로 계산을 해서 작전을 짠다”고 말하기도 했다. 좋은 말이다. 내가 응원하는 LG 트윈스의 감독이나, 선수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괜히 든든할 거 같다. 하지만 그런 것도 연애 초기에는 불가능하다. 추신수는 또 이렇게 적었다. “매일매일 남들보다 4~5시간 더한 훈련을 통해 상황 대처법이나 경기 운용법이 나도 모르게 내 머리나 몸에 자동 입력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추신수의 말대로라면 연애를 많이 해본 사람은 이미지 트레이닝이 쉬울텐데, 그럴 가능성은 높지만, 그래도 아닐 것 같다. 메이저리그 타자들도 KBO리그에 오면 한국 투수들의 변화구와 심판의 스트라이크존에 애를 먹는 것처럼 말이다.


스포츠의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건, 나의 훈련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연애 초기에 그 정도의 전력분석이 가능할까? 남자들은 보통 이렇고, 여자들은 보통 저렇다는 개념은 있을 수 있다. 타자들은 보통 풀카운트에서 풀스윙을 하고, 투수는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잡으려 한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연애 초기에는 상대방의 데이터도 알 수없고, 누군가 데이터를 분석해놓은 스카우팅 리포트도 없다. 상대 투수가 힘으로 윽박지르는 유형인지, 땅볼 유도형인지, 뜬 공 유도형인지 알 수 없다. 상대 투수의 주무기인 구종이 뭔지도 모르고, 평균 어느 정도의 구속이 나오는 지도 모른다. 나를 대신해 먼저 타석에 나가 상대 투수의 공을 최대한 많이 봐주는 1번 타자가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의 전 연인을 만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고졸 신인 선수처럼 아무 생각없이 던지고 치는 게 좋지도 않아 보인다. (이놈의 연애…) 김성근 감독이 말했던 ‘일구이무(一球二無 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 정신으로 들이대면 정말 다음이 없어질 수 있다. 한때 LG 트윈스의 감독이자, 단장이었고 지금은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있는 양상문 감독은 LG 트윈스 시절 더그아웃에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란 문구를 붙여놓았다. 연애를 그런 태도로 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바보였다는 걸 깨닫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양상문 감독은 최근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에게 “새는 지나간 자리는 뒤돌아보지 않는다”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연애를 하면서 뒤돌아보지 않으면 그 사람도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연애에서는 차라리 프로야구선수보다 사회인야구 선수의 마인드가 더 어울려 보인다. 프로선수는 타격이 안 될  때 훈련을 더 열심히 하지만, 사회인 야구 선수는 온라인 쇼핑몰을 뒤져 새로운 장비를 사니까. 그러니 연애에서는 그저 날아오는 공을 계속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공에 헛스윙도 하고, 삼진도 먹고, 데드볼도 맞고, 어느 날은 운좋게 포볼로 출루하고, 그러다보면 조금씩 타이밍이 맞아서 배트에 걸린 공이 백네트로 튕겨가는 경험도 할 것이고, 또 그러다보면 멀리쳐서 외야 플라이 아웃도 당해볼것이며, 그렇게 아웃은 당했지만 3루에 있던 주자가 태그업해서 타점도 기록해보게 될 것이다. 단, 안타나 홈런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연애에서 안타나 홈런은 운이지 실력이 아니다. 한 사람과 10년 넘게 만난 덕분에 이제야 조금씩 말을 알아듣고 있지만, 그래봤자 예전보다 타석당 삼진율이 조금 좋아졌을 뿐이다. 그녀에 대한 상황대처법이나 경기 운용법이 나도 모르게 내 몸에 자동입력되어 있어도 낙구지점을 찾는 건 여전히 어렵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나만큼 그녀도 나의 ‘쿠세’(くせ, 어느 일정한 상태가 버릇처럼 굳어버린 것. 프로야구팀의 전력분석원이나 코치들은 상대 팀 투수의 ‘쿠세’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쓴다.)를 다 파악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쿠세’를 교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쁘다고 하거나, 사랑한다고 할 때 그녀는 종종 “말에 영혼이 없다”고 받아친다. 사실 바쁘거나 졸릴 때 그런 적이 있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할 때, 그녀는 또 ‘담배 피러 가는 거야?’라고 묻는다. 담배를 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피고 싶을 때 그러곤 했다. 그녀의 생일과 해외출장이 비슷한 시기에 있을 때 면세점 사이트에서 선물을 골라보라고 했었는데, 그녀는 “‘깜뿌락지’ 시키지 말라”고 했다. 생일선물과 출장선물을 한데 엮지 말라는 거다. 나도 몰랐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잔머리를 굴렸던 것 같다.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연애에서는 1군에 간신히 붙어있는 백업선수다.


연애 관계가 끈끈하다는 걸 느끼고, 그러면서 행복을 경험하는 순간은 상대가 내 타이밍을 속이려 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10년 전과 비교할 때, 나에 대한 그녀의 변화구 구사율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과거의 그녀는 걷는 게 힘들어도 애써 힘들지 않다고 우겼다가 결국 폭발해 버렸다. 배고파도 배고프지 않다고 했다가 정말 그런 줄 알았던 나 때문에 또 폭발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의 그녀의 구종은 투 피치 투수처럼 간결하다.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그러고, 피곤하면 피곤하다 그러고, 싫으면 싫다고 말한다. 나의 타석당 삼진율이 적어진 것도 상대 투수의 구종이 단순해지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이 쉬워진 덕분이다. 다시 말하면 연애에서 안타나 홈런은 실력도 아니고, 운도 아니다. 어느 한 쪽이 치열한 경기에 대한 의지를 놓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LG를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었다”는 SK 라이번스 시절의 이상훈 투수처럼 누군가는 타석과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한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와 그녀는 같이 앉아 야구를 보는 쪽이다.


연애는 스포츠와 다르지만, 좋은 연애가 관계의 지속과 그로인한 행복감을 느끼는 거라면, 다른 성격의 이미지 트레이닝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상상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훈련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가능하다. <조해연의 우리말 야구용어 풀이>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변수에 대한 대처 훈련이 아닌 “선수로 하여금 최상의 컨디션일 때 여러 상태를 회상해내도록 해서, 그때에 가까운 상태를 다시 실현시키는 훈련법”으로 소개하고 있다. 연애에서도 서로가 가장 아름다웠고, 즐거웠던 시간을 상상한다면 지속적인 관계가 더 수월할지 모른다. 나와 그녀는 지난 10년의 시간 덕분에 그런 순간들도 꽤 많아졌다. 오랜 친구들이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것처럼, 나와 그녀도 처음 만났던 날과 처음 고백한 날부터 그 사이 힘들고 아파했던 시간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한다. 그러고보면 나와 그녀가 해온 이미지 트레이닝은 서로의 구종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팀의 찬란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는 거 였는지도 모르겠다. LG 트윈스의 팬들이 아직도 1990년대의 ‘신바람 야구’를 추억하는 동시에 쌍욕을 하며 오늘의 야구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10년을 함께한 그녀에게는 류중일 감독처럼 ‘믿음의 야구’를 하고 싶다.


'GQ' 5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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