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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Dec 03. 2018

전자렌지가 없는 독신남성의 부엌에 대한 이야기

내 부엌을 사진으로 남겨봤다. 

“전자렌지는 사지 않겠어.”


2년 전 어머니와 떨어져 살기로 하면서 한 결심은 흔들린 적이 없다. 그때 나는 나이 마흔의 독신 남성에게 전자렌지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편한 선택을 하는 존재다. 전자렌지가 있으면 모든 게 편해진다. 마침 계약한 오피스텔 바로 앞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매일 저녁 편의점 도시락을 전자렌지에 돌려 먹는 생활을 상상해봤다. 도시락이 아니면 햇반을 돌려서 대충 김에 싸먹고 말겠지. 너무 편할 것 같았지만, 내 몸에는 좋지 않을 게 뻔했다. 혼자 산 지 약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전자렌지는 없다. 햇반도 없다. 대신 여자친구가 사준 전기밥솥과 이마트에서 산 후라이팬과 웍, 어머니가 챙겨준 그릇들이 있다. 10평 오피스텔 한 켠에 드럼 세탁기와 함께 위치한 이 작은 공간이 내가 밥을 해먹는 공간이다. 

부엌이 생기자, 은근히 욕심이 생겼다. 많은 시도를 해봤다. 마트에서 산 석화 한 상자로 친구들과 소주를 먹고 난 후 남은 석화에서 굴을 떼내 무를 썰어넣고 국을 끓이기도 했다. 어머니집 냉동실에 있던 정체 모를 생선을 가져와 조림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백종원 레시피로 제육볶음도 해봤고, 어울리지 않게 파스타도 해봤다. 물론 조리도구에 대한 욕심도 생겼다. (장비병은 어느 분야에나 있다.) 부엌이 좁아서 많이 사지는 않았다. 이케아에서는 크고 두꺼운 나무도마와 냄비, 그릇들을 샀다. ‘집밥 백선생’을 보다가 중식도가 갖고 싶었는데, 비싼 건 너무 비싸서 그냥 ‘노브랜드’에서 9900원짜리를 샀다. 찌개를 끓이려고 하다보니 뚝배기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것도 샀다. 생선조림을 하려고 보니 좀 넓은 냄비가 필요해서 샀다. 요즘에는 계란말이팬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일본의 주방용품 장인이 황동구리로 만든 계란말이팬이 있다. 6만 5천원 정도 한다. 참고 있다.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먹지만, 모든 음식을 직접 하는 건 아니다. 밖에서 사온 음식을 가공하는 곳도 부엌이다. 예전에는 회를 포장할 때 매운탕 거리는 그냥 두고 왔었다. 이제는 꼭 가져와서 끓여먹는다. 최근에는 춘천에서 제일 유명한 순댓국집에서 포장해온 순댓국을 내 부엌에서 다시 끓여 지인들과 함께 먹었다. 물론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데우는 곳도 이 부엌이다. 어머니는 종종 국을 많이 끓여서 비닐팩에 넣어 챙겨주신다. 나는 그걸 냉동실에 넣어놓고 하나씩 꺼내서 먹는다. 역시 전자렌지가 없기 때문에 꽁꽁 얼은 국을 해동하려면 그냥 상온에 두는 수 밖에 없다. 밤에 잠을 자기 전에 봉지 채로 냄비에 넣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끓여서 먹는다. 반찬 역시 대부분 어머니가 해주신 것들이다. 어머니는 주로 오징어채 볶음이나 멸치 볶음, 그리고 명란젓갈을 챙겨주신다. 명란젓갈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마트에서 산 김까지 더해지면 밥 한공기를 그냥 먹을 수 있다. 가끔은 아침식사로 뜨거운 물에 밥을 넣고 거기에 명란젓갈을 넣어서 먹기도 한다. 지금 냉장고에는 어머니가 만드신 김치 종류만 4가지가 있다. 물김치 한 통, 총각김치 한 통, 최근 어머니가 직접 김장을 해서 만든 김치 한 통, 그리고 종종 찌개를 끓여먹을 때 쓰는 묵은지 한 통. 


다른 반찬은 몰라도 묵은지는 떨어지면 곧바로 어머니 집에 가서 가져오는 편이다. 내가 김치찌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여자친구가 제일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 둘의 취향은 돼지고기보다 꽁치 통조림이다. 꽁치 김치찌개에 계란말이를 해서 먹거나 쏘세지에 양배추를 함께 볶아서 먹는다. 물론 항상 김치찌개만 먹을 수는 없기 때문에 된장찌개에 생선구이를 먹기도 한다. 김치찌개든, 된장찌개든 육수는 다시마로 낸다. 독립 생활 시작 당시 어머니는 건새우와 멸치, 다시마 등을 볶은 후 갈아서 조미료 대용으로 쓸 수 있게 만들어 주셨다. 몇 번 넣어서 먹어봤는데, 그보다는 다시마로 육수를 내는 게 더 깔끔하다는 걸 알게됐다. (간은 소금이나 새우젓으로 한다.) 다시마로 낸 육수로 콩나물국도 끓이고 북어국도 끓인다. 다시마는 그냥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싼 걸 쓴다. 콩나물 역시 마트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싼 걸 쓴다. 북어는 어머니가 하나로마트에서 고른 걸 얻어다 쓰는 편이다. 이 북어로 북어국만이 아니라 미역국도 끓이고, 라면도 끓인다. 이쯤되면 된장도 어머니가 직접 담근 것을 쓸 것 같지만, 어머니도 된장은 사서 쓴다. 나는 그것과 똑같은 된장을 사서 쓴다. (순창 집된장이다. )  


내 부엌을 가지면서 여자친구와 집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여자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의 집에서 요리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 여자친구가 더 많이 했다. 내가 밤늦게 마감이 끝나고 찾아가도 된장찌개와 생선구이를 해줬다. 나는 기껏해야 라면을 끓였고, 설겆이를 했다. 지금은 내가 주로 하는 편이다. 저녁식사를 할 때는 술을 함께 마신다. 주로 청하를 마신다. 여전히 라면도 끓이고 있다. 10년 전, 황태채와 간마늘을 넣고 끓인 라면을 좋아했던 여자친구는 지금도 그 라면을 좋아한다. 연남동이나 서촌에서 근사한 음식과 와인을 먹고 돌아온 날에도 밤에는 라면 1개를 끓여서 청하를 마시는 편이다. 여자친구는 내 집에서 자신의 음식취향을 새로 발견했다며 놀라워 했다. 내가 이렇게 밥과 찌개를 좋아했다니… 나도 놀라웠다. 원래 아침에는 주로 커피랑 과일 같은 거 먹는다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여자친구는 이제 내 부엌에서 나온 음식이 자신의 집밥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그렇게 누군가의 부엌은 누군가의 입맛도 바꿀 수 있다. 


괜히 내 부엌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던 이유는 책 때문이다. ‘그 남자, 그여자의 부엌’이란 책을 읽었다. 여러 사람이 부엌에서 해온 요리들, 그 요리를 함께 먹어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읽고 나면 누구나 자신의 부엌이 새삼스럽게 보일 것 같다. 평소 만들어 먹는 음식과 거기에 들어가는 식재료 하나 하나에 얽힌 이야기들이 떠오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부엌 사진을 한 장 찍어두었다. 다른 부엌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때 이 부엌이 그리울 수 있으니까. 다른 부엌이라고 해도 이곳에서 만든 음식과 다른 게 나오지는 않을 거다. 어느새 마흔. 이미 어른 입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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