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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Jul 08. 2019

'60일, 지정생존자'의 진짜 원작은 따로 있다?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 

'지정생존자'를 한국에서 리메이크 할 때, 제일 먼저 했던 고민은 '제목'이었을 거다. 미국에는 '지정생존자' 제도가 있지만, 한국에는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작진은 '60일'이란 단서를 하나 붙였는데, 그렇다고 해도 '지정생존자'가 어울리는 제목은 아니다. 드라마가 풀어낸 설정으로 봤을 때, 정확한 제목은 '60일, 대통령 권한대행'이다. 그냥 '권한대행'이라고 해도 될 거다. 


그렇듯 '지정생존자'의 한국 리메이크는 많은 것을 바꿀 수 밖에 없는 프로젝트였다. 미국과 한국의 정치 시스템이 다르고, 두 나라를 위협하는 요인들도 다르다. 그러다보니 대통령이 겪게 되는 위기의 순간들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미국과 달리 한국 대통령의 국회연설은 낮에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커크만의 연설비서관은 무슬림이었지만, 박무진의 연설비서관은 탈북인이다. 백악관은 테러의 주범으로 무슬림을 의심하지만, 청와대는 당연히 북한 먼저 의심한다. 이런 변화는 어디까지나 '한국화'를 하면서 진행된 것이다. 흥미로운 변화는 원작에는 없던 설정등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주인공 대통령의 캐릭터이고, 흥미로운 추가 설정은 비서실장이다. 극중이름은 박무진(지진희)과 한주승(허준호)이다. 단 2회 밖에 방영되지 않았지만, 나는 두 캐릭터의 모습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원작의 톰 커크만은 비록 존재감 없는 장관이었지만, 정무적 감각도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선출직으로 일한 적도 없지만, 정치적인 논리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의사당 폭파 이후 그는 매우 당황스러워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정치의 현장에서 해야하는 행동과 말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다. 커크만과 박무진의 다른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바로 양복이다. 박무진은 장관으로 일한 지 6개월이 넘었지만, 여전히 양복과 구두를 불편해 한다. 어쩔 수 없이 구두를 신을 수 밖에 없었던 에피소드도 나온다. 하지만 커크만은 양복과 구두를 불편해 하는 사람이 아니다. 박무진과 커크만 모두 의사당 폭파 당시 대학 이름이 적힌 후드티를 입고 있지만, 박무진은 양복이 불편해서 후드티를 입었고, 커크만은 어차피 할 일이 없어서 후드티를 입었다. 


박무진이 양복과 구두를 불편해 하는 설정은 물론 그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그는 커크만과 달리 아예 정치의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1회에서 나온 에피소드들을 보면 박무진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강직한 인간이 아니다. 그냥 눈치가 없는 사람이다. 과학자로서 그는 정치적인 것을 생각할 줄 모르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데이터를 믿고, 그걸 분석한다. 아마 그는 정치인 답지 않은 따뜻한 마음도 가졌을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가족과 부하직원을 대하는 모습들, 그리고 북한을 배려하는 에피소드를 보면 그렇다. 권력의 자리를 탐한 적도 없고, 권력의 자리에 오를 수도 없는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봤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뜻하지 않게 권력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따뜻한 마음과 이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영화 '광해:왕이된 남자'의 하선이다. 

'광해'의 하선은 박무진과 정말 다를 게 없는 인물이다. 하선은 곤룡포를 불편해하고, 박무진은 의전을 불편해한다. 하선은 배운 게 없지만, 한 명의 백성으로서 가진 생각으로 정사를 펼치고, 박무진은 정치적인 논리를 모르지만, 자신이 아는 과학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하선은 자신의 진심과 따뜻한 마음으로 수랏간 나인과 조내관과 호위무사 도부장의 마음을 얻는다. 박무진도 그러할 것이다. 이건 나의 추측이 아니라, 이미 '60일, 지정생존자'의 캐릭터 설명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청와대 인물들을 소개하는 설명에는 하나같이 처음에는 박무진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점점 그를 지지하게 된다고 적혀있다. 


이렇게 볼 때, '60일, 지정생존자'가 원작에 없는 한주승이란 캐릭터를 만든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류승룡이 연기한 허균과 같은 인물이다. '광해'에서 허균은 하선을 궁에 끌어들인 기획자인 동시에 그를 지휘하는 사람이었다. '60일, 지정생존자'에서도 한주승은 박무진에게 이렇게 말한다. "박대행은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요. " '광해'를 떠올린다면 앞으로 이어질 박무진과 한주승의 관계도 상상할 수 있다. 박무진은 한주승의 말대로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주승은 박무진의 진심이 뭔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한주승은 박무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즉 한주승은 이 이야기에게 하선과 허균의 관계 같은 감동을 위해 설정된 인물이다.  

이게 과연 적절한 리메이크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아직 드라마를 다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겠다. 다만, '60일, 지정생존자'의 제작진이 생각했을 때, 한국화 시키는 과정에서 이런 인물의 변화가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효과적이라기 보다는 효율적이다. 먼저 현재 설정된 박무진이란 캐릭터는 대중의 호감을 얻어본 캐릭터이다. '광해' 때문만이 아니다. '광해'는 영화 '데이브'를 벤치마킹했던 영화였고, '데이브'는 사실 '왕자와 거지'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였다. 또한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한국에서는 박무진처럼 정치에 백지나 다름없는 캐릭터여야만 그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60일, 지정생존자'는 신선한 설정의 원작을 가져와서 익숙한 설정의 이야기로 한국화를 시킨듯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기대할 요소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대통령과 내각이 전부 사라진 상황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을 때, 한국 정치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런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물론 그 상상이 드라마를 보는 한국의 대중을 충족시켜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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