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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Jul 19. 2018

40년 전, 김정일은 남한 영화감독과 여배우를 납치했다

김정일은 영화를 너무 사랑한 비뚤어진 덕후였다.

1978년 2월, 당시 한국의 조간신문들은 한 여배우의 실종사건을 보도했다. 그녀의 이름은 최은희.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벙어리 삼룡이’, ‘춘향전’, ‘지옥화’등으로 1960년대 한국영화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여배우 중 한 명이자, 영화감독 신상옥과 함께 ‘신필름’이라는 제국을 이끌었던 사람. 그녀는 홍콩에 갔다가 사라졌다.

피랍, 유괴, 살인 등이 거론되었지만, 그녀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에는 전 남편이었던 신상옥 감독은 그녀를 찾기 위해 홍콩으로 떠났다. 홍콩 경찰의 조사 후, 그는 현지에 온 한국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은희는 북괴에 의해 납치당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같은 해 신상옥 감독도 실종된다.


두 사람은 납북되었다. 그들의 납치를 지시한 사람은 바로 김정일이었다. 


영화를 사랑한 두 명의 남과 여

한국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영화인이 있지만, 신상옥과 최은희처럼 강렬한 사건을 만든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홍성기 감독과 배우 김지미의 ‘춘향전’ vs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의 ‘성춘향’이라는 대결에서 이긴 승리자였다. 1960년대 한국 유일의 메이저 영화 시스템을 구현했던 장본인이었다. 또한 북한이 김정일에게 납치된 후 북한에서도 자신들의 대표작을 만든 영화인이었다. 특히 이들의 납북과 탈출, 망명에 이르는 사건은 그들이 만든 수많은 영화보다 더 화제가 된 드라마였다. 한국이 아닌 외국의 영화인들도 흥미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인 로스 아담과 로버트 캐넌은 최은희와 그의 가족, 그리고 이들의 탈출을 도왔던 여러 사람을 만나 ‘연인과 독재자’(The Lovers and the Despot)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지난 2016년 1월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된 이 작품이 오는 9월 22일, 한국에서 개봉한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일테고, 또 누군가에게는 먼 과거의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에 일생을 바쳤던 영화인 커플, 그리고 영화광으로 알려진 독재자의 만남을 다루는 이 이야기는 언제 듣고 보아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먼저 이 사건이 당시에 있었던 또 다른 납북사건의 비극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홍콩에서 남편에게 살해된 후 당시 전두환 정권의 반공조작으로 ‘남편을 납북시키려던 여간첩’으로 몰린 수지킴과 같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과거 납북된 또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신상옥과 최은희는 다행히 탈출에 성공해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고, 이후로도 왕성한 영화활동을 이어갔다. ‘연인과 독재자’가 장르영화적인 태도로 이들의 납북 사건을 재조명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터뷰의 대상인 최은희 는 그리운 눈빛으로 신상옥 감독과의 인연을 추억하는 한편, 이제는 당시의 악몽을 지워낸 듯 밝은 표정으로 납북과정의 경험담을 풀어내고 있다. ‘연인과 독재자’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무서운 기억일 수는 있어도 비극은 아니다. 질기고 질긴 로맨스, 긴장감 넘치는 첩보전, 목숨을 건 필사의 탈출, 그리고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영화제작 시스템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사연이 한 데 엮인 전설 같은 실화다.

납치극의 내막은 당시의 보도를 통해 이미 자세히 알려졌다. 신상옥과 최은희는 탈출 후 ‘조국은 저 하늘 저 멀리’란 제목의 수기를 내놓기도 했다. 또 최은희는 자신의 에세이인 ‘최은희의 고백’에서도 당시의 이야기를 상세히 전한 바 있다. (신상옥 감독도 ‘난 영화였다’라는 회고록을 썼지만, 이 책에서 그는 이미 수기에서 다 밝혔으니 여기에서는 내가 북한에서 만든 영화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고 적었다.) 최은희는 자신이 이끌던 안양예술학교에 대한 투자 문의를 위해  갔던 홍콩에 갔다. 그곳에는 최은희의 쇼핑가이드를 해주던 사람이 있었다. 그녀를 따라 누군가를 만나러 가보니 한 척의 보트와 4명의 장정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보트를 타고 가다가 큰 배에 옮겨탔더니 안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렇게 8일에 걸친 항해 끝에 북한 남포항에 도착했더니, 김정일이 마중을 나와있더라는 것이 대략적인 이야기다. 당시 북한이 얼마나 꼼꼼히 납치 계획을 세웠는가는 ‘연인과 독재자’ 속의 한 대목을 통해 알 수 있다.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간 신상옥은 그곳에서 과거 자신의 신필름에서 경리부장을 했고, 나중에 신필름의 홍콩지사장을 맡기도 했던 친구를 만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이미 북한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었다. 신상옥은 자신의 오랜 친구에 의해 납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사랑한 독재자


이미 알려진 이야기들 속에서 ‘연안과 독재자’가 강조하는 부분은 신상옥과 최은희의 납치 과정을 털어놓는 김정일의 실제 목소리를 담았다는 것이다. 이 녹음테이프는 신상옥과 최은희가 북한에 있는 동안 “녹음기를 가방 속에 숨겨” 직접 녹음한 것이다. 이후 북한을 탈출했을 때, 자신들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줄 증거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납북을 두고 당시 한국에서는 그들이 자진월북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들의 자녀들도 그 때문에 당시 ‘빨갱이’의 아이들이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 녹음 내용도 지난 1995년, 당시 ’월간조선’이 보도한 바 있다. 그럼에도 ‘연인과 독재자’에서 김정일이 직접  당시 북한 영화의 현실을 개탄하고, 신상옥과 최은희를 회유하는 목소리를 듣는 건 상당히 신기한 경험이다. (이 녹음테잎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에는 미국의 정보원들도 김정일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지난 2011년 세상을 떠난 김정일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사실 중 하나는 그가 ‘영화광’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린 것도 바로 신상옥과 최은희였다. 신상옥 감독은 ‘나는 영화였다’에서 김정일의 개인소유나 마찬가지인 ‘영화문헌고’의 실체를 설명한 바 있다. 


“그곳에는 1만 5000여편에 달하는 세계 각국의 영화 필름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번역, 녹음된 것이 절반가량 된다. 번역, 녹음된 것은 김정일이 이미 감상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무려 7, 8000 편의 세계 각국 영화를 봤다는 것이 된다. …중략… 이 문헌고의 남조선실, 즉 한국실에는 한국영화 300여편이 보관되어 있는데, 제작년도. 출연 배우. 감독 및 제작진 이름까지 상세히 기록한 목록이 따로 비치되어 있다.” 


신상옥 감독은 “내가 만든 영화 가운데 한국에서는 이미 구할 수 없는 ‘빨간 마후라’의 전반부, ‘평양폭격대’, ‘열녀문’ 등 10여 편의 작품 원판도 보관돼 있었다”고 술회했다. 심지어 지금도 한국 영화인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영화 중 하나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까지 프린트로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수많은 작품을 집착적으로 모으고 감상해온 김정일에게 당시의 북한영화가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연인과 독재자’가 들려주는 녹음 내용에 따른 김정일은 신상옥과 최은희에게 당시 북한영화의 현실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왜 우리 영화는 맨날 나오는 것이 반복하는 게 많고, 영화 이야깃거리가 새것으로 나가자고 하는, 지향하는 것이 전혀 없단 말입니다. 도대체 왜 장면 장면 마다 자꾸 초상난 집처름 우는 것만 찍게 만드나. 우리 영화 안 우는 영화 안되겠나. 상가집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만드나.”


북한에서 영화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우상화 교육에 쓰이는 선전도구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더 나은 선전도구가 아니라 더 나은 영화를 위해 신상옥과 최은희를 납치했다. 7, 8천 여편의 영화를 본 영화광이 만족할 만한 북한영화, 그리고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북한영화. 연인과 독재자’가 조명하는 이들의 만남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도 여기 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이 더 궁금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이것이다.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김정일과 신상옥감독과 최은희는 어떻게 영화를 만들었을까?


영화를 너무 사랑한 비뚤어진 덕후


김정일은 두 사람에게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강요하지 않을 테니,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만들라”고 했다. 덕분에 신상옥과 최은희는 북한에서 금기시된 사항들을 어기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신상옥은 한국에서 사라진 ‘신필름’이란 이름을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는 나라에서 다시 재건할 수 있었고, 김일성의 교시로 로맨스가 금지된 북한에서 ‘춘향전’을 토대로 한 ‘사랑 사랑 내사랑아’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이들의 영화를 위한 김정일의 지원은 아낌없었고, 신속했으며 거대했다. 1년에 약 300만 달러의 제작비를 쓸 수 있었던데다, 동유럽 국가들과의 합작도 가능했고 2만 평이 넘는 규모의 동양 최대의 스튜디오를 지어주기도 했다.(하지만 신상옥과 최은희는 이 스튜디오를 사용하지 못하고 북한을 탈출했다고 한다)


신상옥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북한에 찍은 작품 중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는 ‘탈출기’를 찍었을 당시의 일화도 흥미롭다. “이 작품을 찍으면서 통쾌했던 것은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때였다. 헛심 치고 ‘영화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진짜 열차를 폭파하고 싶다’라고 했더니 금방 허가가 나왔다. 북한에서나 가능한 일로, 내 평생 처음 겪어 본 진짜 스펙터클한 촬영이었다.” 최은희에게도 북한의 생활이 언제나 엄혹했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당시 극장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던 순간이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영화광 독재자와 그의 후원을 통해 자신의 예술혼을 마음껏 불태울 수 있었던 영화인. 이들의 관계는 당시 한국영화계의 현실을 빗대어 볼 때, 더 아이러니하다. 당시 한국의 군사정권이 내세운 검열제도와 영화정책이란, 예술을 진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검열 제도에 반발했던 대표적인 영화인 중 한 명인 신상옥 감독은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에 검열을 거치지 않은 장면 3초가 삽입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영화사 허가까지 취소당했다. (사실 ‘상록수’와 ‘쌀’등의 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한때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에서 영화를 볼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다.) 당시 한국의 영화사들은 정권의 눈치를 보며 반공영화나 문예영화를 만들어야 했고, 이러한 1970년대의 검열제도는 60년대를 통해 크게 성장했던 한국영화산업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남조선에는 민주주의가 없지 않아요? 자유가 없다고… 민주주의도 없고. 창작에 너무 간섭이 많아. 저쪽에서 반공영화(만들고), 이쪽에서 반공영화(만들고)… 그니까 자유가 없다(는 겁니다.)” - 김정일


김정일의 이 발언은 매우 유혹적이다. 어차피 한국에서도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직접 돈을 벌거나 끌어와서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만, 당시 북한에 있던 신상옥과 최은희에게는 막대한 제작비와 영화 제작에 관한 전권이 주어졌다. 이 아이러니는 ’연인과 독재자’가 드러내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김정일에게는 당시 한국의 여러 감독들 중에서 왜 신상옥이 필요했던 것일까? 북한영화의 체질적 변화와 세계화를 꿈꾸던 그에게는 한 명의 예술가인 동시에 뛰어난 테크니션이었고, 세계 영화계에서 인정받은 동시에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충무로를 꿈꾸며 메이저 시스템을 이루어낸 신상옥 감독만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한국의 영화 환경에서 버림받은 신상옥 감독을 납치해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 주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김정일은 그냥 독재자가 아니다. 독재자의 아들이자, 북한의 2인자인 동시에 ‘비뚤어진 덕후’다.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자본을 양손에 쥔 자가 예술에 미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상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사례일 것이다.

이미 알려진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는 ’연인과 독재자’가 갖는 영화적 의미가 있다면, 그처럼 지금까지 보여진 김정일이 아닌, 또 다른 김정일을 탐구했다는 점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인과 독재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영화를 만들어내고, 기어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투영시켰던 집념의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는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 북한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영화에 가진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 신상옥 감독은 지난 2001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아니라) 동구라파만 됐어도 안 올 거였다”고 말한 바 있었다. “우상숭배만 없었으면. 사회주의라는 것이 당시 우리의 이상이었으니까. 근데 거기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회야. 나야 1년에 300만달러씩 쓰고 잘살았지만.” 또 그는 회고록을 통해 북한에서 만든 영화들을 “남한과 북한의 첫 합작영화로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신상옥과 최은희에게 김정일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자신의 행복을 앗아간 독재자로만 기억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 김정일에게 그들과 함께했던 8년의 시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그에게도 자신을 배신한 사람으로만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술에는 국경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내 편도 없다. 그 기이함 때문에 이 이야기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매혹적이다.


*2016년 9월,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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