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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Jul 21. 2018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야기와 그에 대한 기억들

책 <걷는 듯 천천히>를 읽고 떠오른 고레에다 히로카즈란 사람의 정체 

선배가 “너 고레에다 좋아하지?” 라며 자기가 받은 <걷는 듯 천천히>를 주었다. 읽다가 자려했는데, 다 읽어버렸다. <씨네21> 시절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두 번 정도 만났다. 모두 부산영화제 인터뷰였다. 한 번은 <걸어도 걸어도>. 또 한번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두 번째 인터뷰를 끝낸 후, 첫 번째 인터뷰를 떠올리며 약간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건, 어떤 질문을 던지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사연을 이야기한다는 거였다. 


“<걸어도 걸어도>에 나온 ‘옥수수 튀김’이 정말 맛있어 보였다”는 질문도 아니고, 영화적 감상도 아닌 그런 말을 던졌더니, “집에서는 옥수수 알을 뜯는 게 자기 담당”이었다고 했다. 극중의 어머니가 욕실에 새 칫솔을 꽂아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더니, “고향집에 갈때마다 어머니가 항상 그러셨는데, 그건 자고 가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고 말했다. 


<기적>에서는 “아이들 주변에 왜 이렇게 마음 좋은 사람이 많냐”고 물었는데, 극중의 양호선생님에 대해 “학교성적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학교의 틈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다가 끝에는 “사실 어렸을 때, 양호선생님을 좋아했다”고 한 마디를 덧붙여 주기도 했다. "영화에 나온 ‘가루칸 떡’의 맛이 궁금하다"는 또 이상한 감상을 늘어놓았더니, “24살 때 가고시마에 좋아하던 여자애를 만나러 갔고, 그녀가 선물로 준 게 가루칸 떡이었는데, 별 맛은 없었지만 20대 동안에는 그 떡을 먹을 때마다 그녀를 떠올렸다”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풀어냈다.(이때의 여행담은 이 책에도 있다.)  


여러 모로 기자 입장에서는 고마운 인터뷰이였지만, 가장 고마웠던 건 <걸어도 걸어도>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내가 던진 건, “차기작이 뭔가?”라는 ‘그냥 형식상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아닌 존재가 마음을 얻어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배두나에요.” 


데일리 부스로 돌아와 아무 생각없이 인터뷰 기사를 썼는데(데일리는 그냥 빨리 쓰는 게 제일 좋다고 선배들이 말씀하셨다.), 다음날 네이버 연예뉴스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 배두나 만남’ 기사들이 쏟아졌다. 대부분 영화제 데일리를 출처로 삼은 뉴스였다. 본의 아니게 영화제 데일리에서 특종을 한 셈이었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고, 이걸로 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며 그냥 나혼자 좋아했다. (알다시피 그 영화는 <공기인형>이다.) 


어쨌든 이 책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런 끊임없는 기억과 사연들이 더 많이 나온다. 읽는 동안 그냥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 어렸을 때 먹은 수제 딸기 우유, 집앞에 심었던 코스모스 등등에 대한 기억부터, 3.11 대지진, 영화제에 대한 감상, 방송과 영화의 차이, 다큐멘터리의 본질, 자신의 영화적 태도까지... 그는 살아오는 내내 쌓아놓은 기억도 많고, 상념도 많고, 그 만큼 사연도 많은 사람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일본 배우들에 대한 기억들을 풀어놓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걸어도 걸어도>의 어머니, <기적>의 할머니를 연기한 기키 기린은 <기적>의 크랭크인 전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감독도 알겠지만... 어른 장면이 조금 많은 것 같아. 이 이야기, 어른은 배경이니까. 그리고 다들 배경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이니까, 클로즈업 촬영 같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기적>의 연출 태도를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 마지막 문단은 꽤 힘있게 읽혔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문화로 성숙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이 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치와 언론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가장 치졸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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