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죽음이 생각났다. 보통의 사람들 (우울증이 없는 사람들)은 행복했던 기억, 추억들이 삶을 지탱해 준다고 하던데 나에겐 그런 기억들이 없어서일까? 자주 삶을 끝내는 상상을 하곤 한다.
엄마 간병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온전히 내 시간을 나를 위해 쓰고 살아가고 있었다면 나았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 발병 전에도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원인 모를 불안감에 자주 휩싸이곤 했으니깐.
가난으로 점철된 유년의 상처와 제대로 된 보살핌이 없었단 결핍은 이다지도 떨궈낼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온종일 엄마에게 맞춰져 있다. 엄마의 병원 스케줄, 식사 준비와 집안일, 엄마 씻기기 등등
간병을 하기 전에도 종종 그만 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지만 밖에서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바쁘게 지내다 보면 잊히기 마련이었는데 지금은 온종일 엄마만 케어하고 있다 보니 쉽게 떨쳐 내지지가 않는다.
돌아갈 곳이 필요하다. 회사에서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쉬는 것처럼 하루를 끝내고 돌아갈 곳이 나에겐 없다.
내 집이 있지만 새벽에도 엄마는 보살핌이 필요하기에 언제나 곁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엄마 집에서 24시간 상주 중이다.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8평짜리 임대
아파트.. 좁디좁은 집에서 하루 종일 붙어있다 보면 숨이 막혀 온다.
인생이 뭐 별 게 있냐 사소한 행복으로 산다고들 한다.
사소한 행복... 참 애매한 말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어떤 포인트에서 행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경험으로 쌓아 올려진 존재이다.
걸을 줄 몰라도 벽을 잡고 일어서보고 한걸음 내디뎌보고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배운다. 말을 할 줄 몰라도 부모가 하는 걸 따라 하면서 소리를 내어보고 혀를 움직여본다. 뭐든 경험이 쌓이고 누적되어 현재의 내가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행복이란 감정 또한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 일터..
그런데 난 행복했던 경험이 없다. 단 한순간도 없었다곤 못하겠지만 손에 한두 번 꼽을 정도의 순간, 찰나이다.
가족여행을 가본 적도,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밥을 먹으며 하루의 마무리를 해본 적도 없기에 행복이란 그 감정이 참 모호하게만 느껴진다.
몇 살 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막내 작은 아버지 댁으로 갔을 때였나 바다를 처음 보았다. 바다에 앉아서 놀기도 했던 것 같다. 여행이 목적이 아니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이었다.
그 기억에서도 행복하다는 감정은 없었다. 즐거웠나? 아니면 평상시처럼 어른들 눈치를 봤던 걸까
모르겠다. 파도는 꽤 높았고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었다. 그때 기억을 생각하면 그저 우중충한 하늘이 먼저 생각날 뿐이다.
모든 게 그랬다. 첫 상장을 받아왔을 때도 그저 잘했다는 엄마의 짧고 간결한 칭찬뿐이었고 기쁨 따위의 감정은 없었던 것 같다.
사춘기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퍽 즐겁긴 했다. 그 순간만큼은 즐거웠지만 행복이란 건 글쎄.. 모르겠다. 친구들 집안과 우리 집 사정은 매우 달랐기에 즐거움 이면엔 내 사정으로 인한 내 상처는 들키지 않으려 벽을 세웠다.
성인이 된 후의 인생은 온전히 내가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집안의 사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딱 고등학교 때까지 만 이라 생각했다.
일을 쉬지 않으려 했고 일자리가 없이 지내는 시간이 없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돈이 없어서 제약을 받고 하지 못했던 것들 할 수 있어졌고 인생을 한발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술 먹은 목소리의 아빠의 전화나, 아빠가 술 먹고 집에서 난동 부린다는 동생의 연락이 올 때면 내 발목을 과거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기도 했다.
그래도 차근히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남 부러운 직장도 아니고 연봉이 높지도 않았지만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그렇게 작지만 내 이름 앞으로 집을 샀고 이제 정말 내 삶만 생각하면 될 줄 알았다. (대출이지만...)
엄마가 쓰러지고 아픈 부모를 위해 내 삶을 갉아먹는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일상의 소중함은 엄마가 쓰러진 후 절절하게 알겠지만
행복은 아직도 나에겐 물음표 같은 감정이다.
그래서 우울이라는 감정이 잠시도 비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