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풀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풀칠 Nov 28. 2023

성장의 단상

스타트업에서 수집한 성장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

지금 나는 성장을 이념으로 삼는 집단에 속해있다. 스타트업. 이곳에서 대부분의 질문과 답은 성장이란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 회사는 잘 성장하고 있나요. 저는 잘 성장하고 있나요. 우리가 더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빨리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성장이 정체된 것입니다. 성장, 성장, 성장.


오늘은 그동안 모은 성장에 대한 말을 한번 풀어보려 한다. 어쩌면 이 수집품들은 성장을 말할 때 우리가 상상하는 개념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탐색하는 데 도움을 주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성장이란 단어의 중력이 영향을 미치는 일상의 풍경화이거나.


<스타트업은 성장이다. 성장을 못하는 스타트업은 스타트업이 아니다. 중소기업이다.>

이직 첫날 들은 말이다. 스타트업이란 말이 좀 막연하게 느껴졌는데, 명쾌한 설명에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말하는 이의 확신에 찬 어투로 보건대, 사전적 정의라고 불러도 무방할 성싶었다. 검색창에 스타트업의 정의를 쳐봤다. 추천스니펫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걸려있었다. <벤처기업협회에서는 스타트업을 '개인 또는 소수의 창업인이 위험성은 크지만 성공할 경우 높은 기대수익이 예상되는 신기술과 아이디어를 독자적인 기반 위에서 사업화하려는 신생 중소기업’으로 정의하고 있다.> 두 설명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쾌활한 공유 오피스의 분위기가 싫지 않았으므로.



<제가 잘 성장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성장에 대한 고민, 답이 있을까요?>

스타트업은 성장. 성장은 곧 스타트업. 스타트업에 다니는 직원들은 자연스레 지금 잘 성장하고 있는지 걱정할 수밖에 없다. 나도 예외는 아니라 틈만 나면 선배들을 붙잡고 비슷한 질문을 하곤 했다. 들었던 대답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대답은 이렇다. “산을 오른다고 생각해 보자고. 잘 올라가고 있는지 자꾸자꾸 뒤돌아보면서 올라가는 사람보다, 그냥 묵묵히 땅만 보고 걷는 사람이 훨씬 더 빨리 정상에 도착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드는 비결 : 성장>

다른 회사 다니는 사람들과 회사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다른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물었다. “같이 오랜 시간 붙어있다 보면 팀 내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쪽 회사는 분위기가 참 좋아 보여요. 팀 문화를 개선하는 팁이 있나요?” 자리에 같이 있던 선배가 답했다. “성장입니다. 성장하는 동안엔 어깨를 부딪혀도 웃고 지나가고, 성장하지 못하면 옷깃만 스쳐도 싸움이 나는 게 당연합니다. 성장이 약이고 답입니다.” “햐! 역시!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거군요!” 다른 회사 직원은 탄복했다. 당시에 난 회사를 다니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동료와의 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정과 매출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걸 그 대화로 깨달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씁쓸할 것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 생각이 머리에 남긴 남았던 것 같다. 얼마 뒤, 친한 동료들과 프로젝트 회의를 마치고 일어서다 이런 말을 슬쩍 농담처럼 던져본 걸 보면 말이다. “우리 이러려고 만나요?”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공짜였던 것에 돈을 지불하게 됨을 의미한다.>

어느 웨비나에서 들은 말이다. 연사는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예전엔 물이 공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생수라는 ‘프로덕트’를 사 먹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본질은 물을 찾아서 ‘생수’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타트업 씬에서 성장만큼은 아니지만 꽤 자주 들리는 말은 ‘시장을 개척한다’이다. 내가 아는 모든 스타트업 사람들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그들 덕분에 새로운 시장의 기회는 발견될 것이고, 세상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오프라인이 온라인으로 확장되고, 둘 사이에 플랫폼이라는 공간이 생겨난 덕분에 이제 우리는 숨 쉬듯이 돈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이 개척이 끝나는 날엔 숨 쉬는 것마저 공짜가 아니리라.


그런데 요즘은 경기가 안 좋다. 물가가 많이 오른 것은 한스럽지만, 점심시간에 농땡이 칠 공원이나 오후의 햇살, 퇴근시간의 노을 같은 것들이 ‘프로덕트’가 되는 시간이 조금 늦춰졌으니 일장일단이 있다고 봐야 하는 걸까.



<성장 좋아하는 애인은 지밖에 몰라요.>

어느 날엔 친한 동료가 눈이 퉁퉁 부어서 출근했다. 애인과 헤어졌단다. 그는 ‘스타트업 피플’답게 지난 연애를 회고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같이 성장할 수 있겠다 싶어서 끌렸는데, 만날수록 지밖에 모르더라고요.”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옛날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빌 게이츠 아시죠. IT업계의 구루. 빌 게이츠도 얼마 전에 이혼했잖아요. 이유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것 같아서’라던데요. 잘 헤어지신 겁니다.” “그렇죠? 이제 저도 제 성장에만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성장하며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 여기까지가 내가 스타트업에서 모은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잘 성장했는지를 회고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무익한 말잔치나 벌이고 있으니 참 내 앞날이 걱정이다. 내일은 건강검진을 가기로 해서 하루 쉬어간다. 아, 잊고 있었던 성장에 대한 말이 하나 더 떠오른다. <영원히 성장하는 건 암세포밖에 없다.> 내 안에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성장하고 있진 않겠지.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다.


이미 한참 전에 다 자라버린, 작년부터 살이 붙고 털이 부쩍 빨리 자라기 시작한, 건강검진을 하루 앞둔 30대 남성인 나는 더 성장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야식을 거른탓에 간만에 또렷한 정신으로, 삼가 성장에 대해 생각한다.


풀칠 137호(23.05.18)전문  보러가기



credit

야망백수


밥벌이 그 이상의 풀칠을 위하여, 풀칠

에세이레터 풀칠 구독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월루의 미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