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두부 세계2

좋아하는 건 좋아하기만

by 보름달

순두부의 꿈은 쉐프이다. 그러니까 요리를 대접해서 그것으로 수익을 창출해내는 전문 요리사가 되는 것이다. 나는...꿈도 야무지다고 생각한다.


번듯한 직장에 남부럽지 않은 학교를 졸업해서 부모님의 자랑으로 살아가던 큰아들이 어느날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돌아갔다. 편지에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멀리 음식 유학을 가겠다는 천둥번개치는 소리가 담겨있었다. 편지를 받아든 부모님은 다 큰 아들 붙잡혀 앉힐 수도 없으니 마냥 속을 끓이고 발만 구를 수 밖에 없었다. 그 편지를 남겨놓고 돌아온 순두부는 나와 연애를 시작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순두부는 자신이 유학갈 생각이라고 했다. 아직 직장 생활을 제대로 시작해보지 않은 그때의 나는 뭔가 이상에 가득찬 답을 했다.


음.. 어떤 것을 더 공부해보고 싶어요? (덜 친했기 때문에 존대했었다.)

나는.. 음식이 좋아. 먹는 것도 좋고. 그래서 요리를 공부해볼까 생각했어.

...요리요? 그 쉐프 말하는 건가요?

응. 지금 일단 호주로 갈까 생각하는데.. 그러면 너를 잘 못 보니까...

음.. 뭐, 꿈을 이루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죠!


지금 생각해보면, 자아실현이 어쩌고, 꿈을 이루며 살라는 개뼈다귀 같은 대답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유학을 갈 거라고 생각한 채로도 연애는 잘만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연애가 참 즐겁다고 생각할 때쯤, 순두부가 프로포즈를 했다. (드라마에 보면 프로포즈를 받고 눈물이 글썽거리며 감동도 하고 그러던데..) 직장을 막 다니기 시작한 나는 모은 돈이 하나도 없었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으며 정말 둘이서! 알뜰살뜰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순두부는 결혼을 위해 대출을 받고, 인생에 다시 없을 돈 쓰기를 하면서 무언가 생각이 많아지더니, 불현듯 유학을 포기했다.

유학만 포기한 줄 알았으나, 직장에 사표를 내겠다는 야심차던 계획도 접었다. 덕분에 아들이 마음을 잡았다면서 한없이 기뻐하시는 부모님과는 달리, 나는 일말의 씁쓸함이 생겼다. 나로 인해 자아실현을 못 하고 주저 앉은 느낌이랄까. 결혼만 아니었으면 자유로운 영혼이 자유롭게 살아갔을텐데, 가장의 굴레가 씌워지니 옴짝달싹 못한다는 그저그런 평범한 남편으로 살아갈 순두부의 모습이 막 눈앞에 아른거리면서 안타까움이 폭발했었다. 그래서 집에서 마음껏 요리를 해보라고, 너의 꿈을 펼쳐보라고 응원했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요리의 꿈을 놓지 않고 있던 순두부는 그때, 요리학원에서 양식기능사반을 수강했고, 앞치마도 두르고 칼도 휘두르면서 나름 초보 쉐프로 걸음마를 떼기도 했었다. 그의 자아를 실현시켜주기 위해 등록한 요리학원이 주말반이었기에, 나도 지루함을 달래고자 제과반에 들어서 열심히 빵을 구워냈었다. 나름 유익한 주말이라며 뿌듯하기도 했다. 그래서 요리를 좀 할 줄 알겠거니, 생각했던 나는, 정말 사람을 볼 줄 몰랐다.


순두부는 일단 정신이 없다. 정돈을 못하고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하다가 다른 것이 생각나면 그대로 그것을 하러 간다. 퇴근하면 순두부의 행적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움직이는 모든 곳에는 흔적이 남는다. 그 상태 그대로 요리를 한다. 음식을 하다보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밑준비와 빠르게 끝내야 하는 조리가 자연스럽게 그려지기 마련이다. 가령 잔치국수를 끓인다면, 육수 내는 것이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미리 앉혀놓고, 그 다음에 고명을 만들고 마지막에 면을 익혀서 국물을 얹어 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직관적인 순두부는 내가 가는 곳이 곧 길이기 때문에, on my way 조리법을 시작한다. 면을 삶고, 고명을 만든다. 그 다음에 국물을 부으려니, 아차 육수를 안 끓였네? 의 순서이다. 그러니 뜨겁게 먹어야 할 음식이 식어서 나오거나, 순서가 바뀐 채 조리한 음식에선 가끔 기상천외한 맛과 향이 난다.


거기에 모든 주방용품을 생각나는 족족 꺼낸다. 쓰고 정리하며 공간을 만드는 재주는 없다. 식탁과 싱크대의 경계가 무너지며 모든 것이 혼돈에 빠진 현장. 소금은 뭉치지 않게 넣어야 한다며 가스레인지 위에 넓게 뿌려지는 소금과, 쓰던 숟가락이 그대로 들어가는 양념통들은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 게다가 세상을 바라보는 독창적인 관점은 음식에도 융합을 일으킨다. 그날 보이는 식재료는 모조리 한 곳에 빠진다. 부대찌개에 빠지는 파김치, 김치찌개에 녹아든 명란, 된장찌개 속 만두. 그래, 그렇다고 할 수 있어. 근데 왜 그 결과물은 꼭 시골집 강아지가 먹는 것과 같아 보이는지, 눈을 여러번 깜빡여야 한다. 이건 사람이 먹는 것이라고.

어느날부터, 그의 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쉐프란 얼마나 되기 힘든 일인가. 이런 주방에서 나온 음식을 누가 돈 주고 사먹는다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나는, 이젠 대놓고 얘기한다. 당신, 쉐프는 아니야. 세상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건 분명히 달라.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대로 두는 것이 가치로울거야. 애써 부정하던 순두부도 한 두번 음식을 해보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 엉망진창의 부엌을 마주했다. 그리고선 자아 성찰을 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를 이해했다.


그런 순두부를 보면서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잘한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조차 숨기는 사람과, 좋아하는 것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밀고나가는 사람의 차이를 떠올렸다. '나는 아마 못 할거야, 내가 그걸 잘할 수 있을까?, 나한테 맞는 일일까?' 백 번을 생각하고 한 걸음을 겨우 떼면서도 벌벌 떠는 사람한테는 순두부의 자신감이 막무가내로 보여졌었다. 정말이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이런건가 싶었다. 그런데 삶에는 가끔 그런 근자감이 필요했다. 일생일대의 시험을 치는 순간에도 '내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사로잡혀 불안감에 잠식당하는 나는, '나에 대한 믿음'이 너무도 부족했다. 순두부는 수능을 앞두고 전날 풀어본 문제가 다 틀렸었는데, 그때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고 한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것이 아니라, 정말, 그 틀린 문제가 하등 타격을 주지 않았다는 거다. 왜 그랬냐니까, 자기는 자신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수는 무의미했더랜다. 그래서 물었다. 수능을 앞두고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음..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모두 펼쳐낼 수 있는 날이다! 아 신난다! 제대로 보여줘야지'

대단하지 않나(심지어 재수였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도, 자신이 그동안 공부해왔던 그 노력과 시간을 믿는 마음이 더 컸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고 정말 열심히 했으니 자기는 이제 드디어 실력을 펼칠 날이 오는 것이라고. 결과적으로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뒀으니, 자신을 잘 펼쳐내고 왔던 모양이다. 그 말을 듣고선 그때부터 마음을 단단히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했을 땐 충분하다 생각하기, 나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보기, 잘할 것이라고 건방도 떨어보고 안 되면 so cool! 의 마인드로 살아보기.

걱정쟁이였던 나에게 순두부는 모든 상황에서 장미빛 미래를 '먼저' 꿈꾸게 한다. '안 되면 어떻게 해?'의 부정과 걱정으로 점쳐졌던 나의 미래에 순두부가 난데없이 개입하면, '그럴거야, 그렇게 될거야!'로 순식간에 뒤바뀐 미래를 마주한다. 간혹 안 되었을 경우를 미처 생각하지 않아 대처가 느리거나 주춤거리기도 하지만, 결국엔 '차라리 잘 됐어! 이것도 좋아! 다음에 또 좋은 것이 있겠지'라며 그 또한 순응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내 세계에 없던, 혹은 내 세계에선 생각조차 두려웠던 그 단언이, 순두부와 함께라면 꽤 할 법한, 마치 될 법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자신에 대한 믿음, 거기에 더하는 긍정의 마인드. 두 가지가 함께하는 순두부는 쿠크다스 멘탈인 나에 비하자면 비브라늄 멘탈이랄까. 그래서일까? 겉은 엉망진창에 혼돈의 도가니여도 멀쩡히 잘만 굴러가는 건 속에 단단한 비브라늄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인가보다. 오늘도 또 한 발짝, 순두부 세계에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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