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라소라빵 May 12. 2023

자기혐오에 갇힌 모든 어른이들에게

그리고 잘 가! 유쾌하고 부족한 우리 친구,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오늘의 리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 Creep


어딘가 경험이 없어 어리숙한 이들. 그렇기에 어른이 나서서 먼저 보호해줘야 하는 이들. 바로 어린이들이다. 그런데 요새는 어린이라는 단어가 어른들에게도 붙는다. 클라이밍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클린이', 헬스에 처음 도전하는 이들에게 '헬린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처럼. 어린이들 입장에선 나이 꽤나 먹은 이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빼앗아가니 곡할 노릇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 사회가 불안정한 탓에 어른들도 어린이가 가지는 특권을 시샘하는 것이 아닐까? 철두철미한 준비도 경험의 공백을 메울 수 없기에, 어른들도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 당혹스럽고 무섭다. 그래서 어른이 되었을 법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키덜트니 어른이니 하면서 다들 나이 들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이건 처음이에요. 그러니 어린이 대하듯 친절하게 대해줘요!' 하고 말이다. 


그러나 어른이라고 계속 어린이고 싶었던 건 아니다. 누구보다 멋지게, 사랑하는 이들을 책임지는 삶을 어릴 적부터 꿈꿔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사회는 어느 때보다 다재다능한 사람을 원하고, 우리는 참 미숙해 때로는 자괴감이 든다. 바로 이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오늘의 사회적 영화 보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영화관람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소소한, 혹은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진작 어른이 돼야 했으나, 결국 어른은 되지 못했던 인간군상들이다. 캡틴 아메리카처럼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정의를 가슴에 품은 것도 아니요, 토니 스타크처럼 멘토가 되어주기엔 자기 앞가림이 바쁘다.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기엔 각자 어딘가 부족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이들은 요즘 사회가 정의하는 '어른이'의 정의에 부합하는 이들이다. 각 멤버가 어른이 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선 같은 영화 1~2편, 엔드게임을 거쳐 많이 풀렸는데 유독 과거 이야기를 꽁꽁 숨기고 있는 한 마리(?)가 있다. 바로 너구리(Racoon)인 로켓. 그래서 이번 3편은 그런 로켓을 주인공으로 어린아이 혹은 성장하지 못한 어른을 주제로 이야기를 준비했다.




관람포인트 1_성장하지 못한 어른, 어른이
영화의 3가지 파트. 정말 눈이 즐거운 우주를 항상 만들어 준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크게 나누면 3가지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아담 워록의 급작스런 습격으로 인해 로켓이 중태에 빠지고, 친구이자 가족인 로켓을 구하기 위해 가오갤 멤버들이 로켓의 과거가 숨어있는 오르고 스코프사에 침입하는 과정인 Part1. 이후 로켓의 창조주이자 타노스와 같이 '우주를 조금 더 완벽하게 만든다'는, 겉보기엔 이타적인 철학을 품은 빌런 하이 에볼루셔너리를 쫓아 카운터 어스로 떠나는 Part2. 마지막으로 아센터 연구소에서 로켓을 구하고 가오갤 멤버들이 다시 힘을 합쳐 빌런을 물리치는 과정인 Part3.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히어로 무비의 줄거리지만 하이 에볼루셔너리의 철학과 가오갤 멤버들의 대비가 이 영화를 정말 각별하게 만든다. 완벽을 지향하는 빌런과 완벽과는 억만년 거리가 있는 어딘가 모자란 히어로들의 대결이라니...(이 대결 구도는 영화 내내 나를 정말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빌런과 완벽과 거리가 먼 히어로들의 대결

영화 속 하이 에볼루셔너리는 다툼과 분쟁이 없는 이상사회를 꿈꾸지만 그 대의를 위해 수많은 실험체들을 고문하고 잔인하게 개조한다. 타노스가 숭고한 대의를 위해 절반의 우주를 날려버린 것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은 것처럼, 하이 에볼루셔너리의 철학 역시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던 철학이다. 바로 나치즘과 파시즘,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우생학적 사상들. 


이런 우생학적 편견들은 여전히 사회 속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유전자레벨의 개조와 세뇌가 아닐지라도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향'을 위해서라면 대의를 위해 소수를 기꺼이 희생시키고, 누군가의 다양성과 개성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나지 않는가? 대체로 이상향이라고 불리는 디스토피아는 다양성의 무덤 위에 세워지는 법이다. 하이 에볼루셔너리 역시 로켓에게 이상향을 약속하지만, 정작 그를 이상향으로 데려갈 생각은 없다. 왜냐면 로켓은 하이 레볼루셔너리의 기준에서 이상향에 어울리지 않는 소수 쪽의 인물일 테니까.

 

영화 초반의 Creep은 로켓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에 가깝다

그렇게 사회(혹은 하이 에볼루셔너리)가 추구하는 이상에 배신당해, 스스로가 그 이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라쿤은 영화 시작부터 한 OST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른다. 바로 Radio head의 전설적인 팝송 'Creep'.



But I'm A Creep 하지만 난 괴상한 놈이야

I'm A Wierdo 미친놈이라고

What The Hell Am I Doing Here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아이를 주제로 하는 영화의 첫  OST가 어떻게 아이 사진이 들어간 Creep이지? 선곡의 천재다 제임스 건은

 영화의 첫 OST로 선정된 'Creep'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멤버들, 특히 로켓이 스스로에게 품은 감정을 대변하는 노래이다.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벌레와 같은 혐오스러운 물체, 혹은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새끼'란(많이 비꼬는 뉘앙스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Creep이란 단어처럼 가오갤 멤버들은 자신을 미워할 동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사회가 말하는 평범함에 녹아들기엔 너무나 특이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기에 스스로를 사랑하기가 어렵다.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를 외면한 것을 마지막으로 우주 해적에 납치당한 지구인부터, 광적으로 균형에 집착하는 양아버지 덕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매, 그 양아버지의 부하 때문에 가족을 지키지 못했던 아버지까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가오갤 멤버들이다. (그런 감정마저 자학과 유머로 극복하기에 이들이 사랑스러운 거겠지만)


그런 Creep으로서 자각이 있기에 그들은 항상 어른으로서, 혹은 히어로서 책무를 다해야 할 때 어른스럽지 못하다. 타고난 재치와 배짱으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긴 했지만, 감정이 앞서 중요한 임무를 망쳐 놓거나(대표적으로 스타로드의 타노스 뺨따귀) 더 성숙한 어른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이를테면 아버지(욘두)의 희생 혹은 어른의 책무를 다하고자 했던 히어로(토니 스타크)의 도움을 받는다던지. 몸은 성숙했건만 정신적으로든 인간관계에 있어서든 어중간한 어른이, 바로 요즘 어른들의 모습이 겹쳐지기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MCU 세계관 속 어느 히어로보다 친근하게 다가온다.




관람포인트 2 완벽함은 세계를 구할 수 없다.
이 영화엔 유독 어린 아이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이 영화엔 '어른이'뿐 아니라 정말로 어린 친구들도 많이 나온다. 생쥐를 베이스로 개조된 종족부터 어린 시절의 로켓과 동물 친구들까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상태를 '어린이'라고 정의한다면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아담 워록까지 어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어린이란 '아직 어른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 그 모두를 포용하는 개념이다. 하이 레볼루셔너리는 바로 이 어린이들을 위해(혹은 타노스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행동한다.


그러나 과거 수많은 천재들이 그랬듯, 수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해결된 것은 거의 없다.(이는 하이 레볼루셔너리 같은 천재들이 겉으론 이상을 위하는 척 행동하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피조물의 등장에 분노하는 것처럼 위선으로 가득 찬 자기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상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셀 수 없이 희생된다.  마치 현대 사회에서 정의 내리는 성공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방황하고, 어른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성공을 쫓느라 정작 진짜로 존재하는 문제를 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이상이 구해내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하이 레볼루셔너리는 자신의 이상향을 기준으로 어린아이(혹은 동물)의 개성과 장점을 무시한 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강제한다. 뒷다리 힘을 개성과 장점으로 삼는 토끼, 플로어에겐 억지로 거미 같은 다리와 육식 동물의 이빨을 떠올리게 하는 입을 덧대는가 하면 바다코끼리인 티프를 육지에 억지로 적응시킨다고 바다에 최적화된 지느러미와 꼬리 대신 바퀴를 달아놓는 식이다. 그러나 본래의 태생과 개성을 무시한 교정이 원활하게 작용할 리가 없다. 보기 흉측한 Creep이 될 뿐이다. 결국 하이 레볼루셔너리의 이상에 못 미치는 이들은 구제받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폐기처분 판정을 받는다.  


하이 레볼루셔너리의 이상은 분명 극단에 치우쳐져 있지만, 비슷한 사례를 주변에서 종종 발견하곤 한다. 그림으로 그린듯한 성공을 강요하는 사회와 학생의 개성은 말소하고 맹목적인 교육과 교정을 반복하는 학교들. 대의를 위해 개인의 개성과 특징을 말소하는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이들을 구하고자 등장한 완벽한 선은 오히려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누구일까? 우문현답일지도 모르지만 바로 어른이다.

  


관람포인트 3 완벽해서 어른이 아니야. 책무를 다하니까 어른이야

덜떨어진 어른들이 하는 일이 그러하듯 가오갤 멤버들의 작전은 완벽과 거리가 멀다. 원래 목적인 라쿤을 구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본의 아니게 네뷸라와 드렉스, 맨티스가 역으로 인질로 잡혀버리고 만다. 늘 그렇듯  책임을 돌리기에 바쁜 이들은 어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분노와 자기혐오에 가득 차 모진 말들을 내뱉는 이들 앞에 다른 존재가 나타난다. 바로 하이 에볼루셔너리가 창조하고, 신세계로 이주시키고자 준비한 어린이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역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규정되어 있던 엄격한 완벽이다. 그것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결국 폐기당해야만 하는. 


그러나 완벽이 구해내지 못했던 이들을, 누구보다 불완전한 어른인 가오갤 멤버들은 구해낸다. 그것도 가장 완벽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들이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개개인이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모자란 이들이지만 이들은 어른으로서 책무를 피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결점만큼이나 뛰어난 개성과 서로의 단점을 감싸줄 좋은 동료들이 있었다. (마블 영화의 히어로들은 영웅을 우상화하지 않는 점이 좋다. 그들은 언제나 인간적인 나약함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책무를 다하기 때문에 멋진 히어로이다.) 


독특한 사람, 괴짜가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결점이 가득한 이도 자신이 모르는(혹은 노력으로 길러낸) 장점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장점이 자신을 혐오하게 만든, 결점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은 마지막 구출장면을 더욱 뭉클하게 만든다. 딸을 지키지 못했던 드렉스는 유일하게 아이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였고, 아버지로부터 잔인하게 개조당한 탓에 기계의 몸과 심장을 지니고 있던 네뷸라는 덕분에 거의 망가진 우주선에 동력을 공급하여 아이들을 구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에고가 오로지 자신의 숙면을 위해 만들었던 맨티스는 자신의 태생 덕분에 아빌리스트(2편, 3편에 등장하는 우주 괴수)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이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이들을 그토록 괴롭게 했던 자기혐오의 원천이자 결점은, 어떤 의미로는 결점이 아니었다. 



자기혐오도 긍정할 수 있는 어른이 되길 바라며

어렸을 때는(지금도 어리지만) 100점만이 전부이고, 스스로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완전무결함이 뛰어난 어른으로서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더라.(심지어 내 인생마저도) 하고자 하는 일이 더 큰 대의와 선을 위한 일일수록, 큰일을 해내고자 도전할수록 뼈저리게 느껴지는 건 나의 부족함과 결점이었다. 그런 결점 때문에 스스로가 몸서리 처질 정도로 미워질 때도 있었다.   


그런 부족한 우리지만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었다(아니 돼버렸다). 나의 모자람으로 인해 무언가 잘못될 때마다 '이래도 어른이라 할 수 있나?'라는 기분에 자괴감이 든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러나 선이란 꼭 모든 준비가 갖춰져야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꼭 완벽하고 성숙한 어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완벽한 어른보다 그런 어른이 분명 멋있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도 부족한 어른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어른이'로서 가오갤 멤버들이 각자 품었던 자기혐오를 극복하고 어른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떠돌이 신세에 불과하던 이들은 각자 책임져야 할 것들을 얻게 되니까), 어린이였던 이들이 실패한 멋진 어른들을 보며 배우고 자라는 영화기도 하다.  천지창조(Creation of Adam)를 오마쥬 하며 굉장히 웃긴 장면으로 연출되긴 하였지만 힘을 분출할 줄 밖에 모르던 어린이는 어른들의 등을 보며 깨닫게 된다. 완벽하게 행하기에 어른인 것이 아니라, 책무를 다하고자 하는 모습이 어른임을.





-p.s-

영화 마지막에 춤은 머저리들이나 추는 것이라 말하던 드렉스가 춤을 추는 장면과, 3편의 영화 내내 거의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네뷸라가 웃으며 리듬을 타는 모습에 살짝 눈물이 나올 뻔했다. 오늘도 책무를 다했던 멋진 어른이들이여, 우리도 내일엔 이들처럼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바빌론>이 던지는 질문, 영화 아직 좋아하시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