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라소라빵 Aug 22. 2023

하나의 점으로 파편화되는 우리들

최근 빈번한 칼부림 사건들을 바라보며

행복이 무엇인가를 물으러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한 기자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굉장히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은 각자의 답변을 내놓았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곳은 샘물처럼 솟아나는 석유 덕에 사막 위에  휘황찬란한 마천루를 일군 나라였.  적어도 앞으로 몇 세대,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유지되는 동안 먹고살 일 걱정 없는 이들은  스스로행복하다고 여길까?


그러나'행복하다'라 대답하는 그들의 모습이 기자는 어딘가 석연치 않아 보였다고 한다. 누구보다 부유하고, 그래서 자유롭지만 이들은 문자 그대로 '뿌리'가 없다. 그들은 전 세계의 온갖 진귀한 것들, 이를테면 최고급 명주나 슈퍼카, 돈을 주고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명품과 굿즈로 집과 박물관을 채우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조상은 어떻게 살았는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야 그들의 조상이 석유를 발견하기 전 까진 제국의 침략에 허덕이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고,  선조가 켜켜이 쌓아 올린 과거는 거친 모래바람에 삼켜져 흔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제삼자의 섣부른 짐작일지도 모르지만 글을 쓰는 기자는 그들이 자본주의 시대의 무한한 자유를 얻은 대신, 왠지 모르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뿌리 없음'의 황량함이 느껴졌다고 한다.


모래 위에 성을 쌓아 올린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사막 위의 어린 왕자를 떠올리곤 했다. 모자람이 없는 자신만의 을 가지고 있지만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다른 행성으로 여행을 떠난 어린 왕자. 어린 왕자는 지구에 와서 여우를 만나고 나서야 관계를 만드는 방법을 익혔다. 서로의 거리를 좁혀가며 서로를 길들이는 것처럼 'Like-Minded'한 부분을 알아가는 것. 그제야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 지구의 장미 다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같은 뿌리를 공유했던 존재는 다시 한번 우주를 건널 만큼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뿌리가 존재한다. 쉽게 닮은 사람을 발견하고,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고 나누기 쉽게 해주는 것들. 작게는 취향부터 가족, 크게는 고향과 국가, 문화에 이르기까지. 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행을 떠나도 결국은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만큼 뿌리내린 적이 없는 곳에서 삶을 구가하는 것은 힘들고 외로운 일이기 때문 아닐까?(심지어 물질적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더라도) 


물론 뿌리라고 좋은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처럼 강요되는 남성성이나 여성성, 문화적으로 터부시 되는 무거운 의무들. 그러나 같은 뿌리 아래, 비슷한 사회적 단계를 거쳐왔다는 사실만으로 생판 모르던 남과 나는 점과 점이 아니라 선으로 연결되게 된다. 이런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이유는 최근 유행처럼 퍼지는 칼부림 사건의 가해자들로부터 뿌리 없음의 단편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의 꼬리표를 살펴보면 몇몇 공통점이 있다. 연령은 작게는 10대에서부터 많게는 30대 초반, 성별은 백이면 백으로 남성. 박탈감이 이유든, 사회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이 이유든  우리가 뿌리라 여기는 많은 것들과 격리되어 있는 이들이다. 살인예고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셀 수 없는 모방범죄로 이어졌으니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뿌리로부터 단절된 이들이 무척 많다고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우리나라는 뿌리가 약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어느 나라보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역사책을 몇 번만 뒤적여봐도 손쉽게 함께 어려움을 이겨냈던 시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부모노릇, 자녀노릇 등, 사회가 호명하는 이름들이 지겨울 정도로 호출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개인이라는 단위로 파편화된 끝에 뿌리는 사막에 파묻히듯 단절된 인간군상들이 생겨났고, 고립된 이들은 거리를 좁히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현대사회는 고립되었음에도 타인의 세상을 접하기 쉽다. 그런데 이들이 넷이나 SNS로 접하는 타인의 세계는 온전하지 않다. 각종 희로애락이 날 것으로 펼쳐지는 온라인 세계 속 면면은 진실과는 격리된 누군가의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좋은(혹은 안 좋은) 부분들이 특히 뾰죡하게 바깥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어린 왕자가 처음엔 가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길들이지 못한 장미가 세운 가시는 그저 나를 위협하는 것으로 곡해된다. 어린 왕자는 여우로부터 길들임을 배웠기 때문에 장미가 지닌 가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가시의 단편만을 바라보며 자신이 만든 가시를 더욱 날카롭게 갈아 남에게 찔러 버리고야 만 것이다.


 사회와 단절된 이들이 스스로 단절을 선택하고야 마는 뿌리가 하나 있다. 어쩌면 자연선택의 야생을 벗어나, 어느 정도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거대한 문명을 구축할 수 있게 해 주었던 뿌리, 바로 인간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도덕과 윤리, 법이라는 뿌리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단절된 이들은, 어디와도 연결되지 못했기에 도덕과 법과도 연결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모두가 외로운 어린 왕자처럼 삶에 던져지게 된다. 세상에는 생텍쥐페리가 그린 것처럼 허영심 많은 남자도, 돈 만으로 세상을 셈하는 사업가도, 하루를 가로등만 켜며 보내기도 벅찬 소시민도 있어 한 데 엉켜 살아간다. 그러나 생텍쥐페리도 여우 같은 친구나, 조종사 같은 어른을 한명 조차 만나지 못한 아이를 상상해 본 적은 없지 않을까?  범죄에 대한 처벌은 국가의 몫이지만, 갈수록 파편화되는 사회를 어떻게 연결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모든 이가 자신의 장미와 여우를 만나는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계를 쳐다보지 않은 게 얼마만이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