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서야 쯪쯪
내게 좋아하는 물건이 뭐냐 물으면 메모지와 볼펜을 말할 정도로 나는 기록과 체크완료 과몰입러였다. 체크를 표시했을때의 그 성취감과 만족감 때문에 심지어 휴일에도 수십개의 체크리스트를 들고 살았으니까. 이렇게 나는 그동안 체크 중독자였다. 완료되고 성취된 것에 내 존재 의미를 두며, 나는 무언가를 완료하고 성취하려 산다고 정의했다.
심지어 지난번에 이런 일도 있었다. 지인과 함께 원래는 가볍게 양재시민의 숲 근처 서울둘레길을 걷자고 한것이 걷다 보니 예상치 못한 산행이 되었다. 예상보다 힘들어 헉헉대며 산을 오르고는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나는 중간 중간 떠오르는 업무 생각들, 업무상 해야 할 것, 사야할 것 등을 애써 모바일에 낑낑대며 기록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내모습을 알아차리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 지경(?)까지 해야 할 일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스스로 해야할 일 무덤을 왜 끝없이 파는 걸까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가장 큰 욕구는 무엇이냐, 무엇으로 삶의 원동력을 얻느냐고 물을때 항상 "인정"이라고 답했다. 스스로에 대한 인정, 타인에 대한 인정 등 말이다. 올 초 가장 힘들었던 그 즈음에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일적으로 인정받았었다. 누구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그렇게 인정의 표현을 했고, 나도 느꼈고 객관적인 성과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람때문에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일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었다는게 매우 모순적이었다. 능력과 역량, 리더십 등 인정 받았는데, 왜 이렇게 낙심이 되고, 사람이 밉고, 모든 의욕이 떨어지는 이 무력한 감정이 계속 되는지 답을 찾을 수 없어 한동안 굉장한 슬럼프에 빠졌었다.
그런데 그 날 우면산에서 불현듯 알아차렸다. 내가 인정받으려고 했던 모든 행위(완료하고, 이루고, 해결하고, 성취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그 체크의 행위)들이 결국 나는 풍요함, 채워짐의 욕망이었다는 걸. 이쯤 되니 '나의 해방일지'에서 추앙하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여주인공이 한번도 삶에서 채워진적이 없었으니 그 채워짐을 느낄 수 있게 추앙해달라고. 갈증을 느꼈던 그 채워짐의 욕구가 무엇인지 와닿아서, 너무 와닿아서 그 장면을 몇번이고 돌려봤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나는 삶에서 항상 채워짐, 풍요함을 원한다. 나아가 초승달이 보름달로 변하듯이 시간이며, 일이며, 감정이며, 관계며 그 가득참을 향해 번성하고 번영하는(flourish)그 과정을 원한다. 내 아이디가 풀문인 이유이기도 하다. 채워진 완성의 단계가 아니라 더 넘쳐흐르는 과정의 단계이다. 그 단계를 누군가와 함께 할때 더 큰 기쁨을 느꼈다. 그간 업무적으로는 인정받고 성취한게 많아도 그 단계에서 다음으로 더 흘러가지 못했고, 누군가와 같이 공유하지 못해 공허했다는게 이제야 이해가 된다. 이제야 나의 한조각을 또 이렇게 무심히 알아차리게 된다.
종종 점심밥을 먹고 들어오다가 오후에 먹을 초코렛을 산다. 그럴때면 직원들 생각이 나고, 어김없이 몇 개를 더 들고 나온다. 내 화장품을 사러갔다가 립스틱 색깔이 어울릴 친구가 떠오르면 고민없이 결제한다.(심지어 사놓고는 만나지를 못해 6개월 넘게 전달 못한 적도 있다) 지난번엔 직원 누군가에게 뭘 들고 나타나자 "선물하는 것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고, 나는 "아니요"라고 답했다. 그런 질문도 처음이었다. 아 내가 이들을 사랑하는 구나 그 순간 깨달았다. 선물하는 걸 좋아하는게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사랑을 통해 오늘의 풍요함을 느끼는구나 하는 걸.
처음엔 나를 차갑게 보고 매우 이성적이다라고 보던 사람들고, 알고 보면 나더러 츤데레, 감정이 풍부하다, 정작 중요한건 직관적으로 결정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인정과 성취’가 나의 존재이유라 생각하니 삶에 에러가 발생할 수 밖에. 이토록 나를 몰랐다니 나이 헛먹었구나 싶었다.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해야 할 일을 완료하면서 생기는 이러한 성취들은 활력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무언가의 완료를 넘어 그 행동이 내게 주는 감정이 무엇이며, 왜 그것이 중요한지 물었어야 했다.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겠다고, 일상의 평정을 찾겠다고 하는 매일의 작은 성취 습관이 목표가 아닌 목표가 되었는데, 그것이 내 삶의 원동력인 줄 착각했다. 물론 성취를 향한 목표는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니 성취했음에도 왜 힘든지 무력감과 무기력에 빠지는지 알 수 없었고 헤어나오지 못했다.
내 생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기준이 서지 않으면 결국 주변의 요구에 휘둘리거나 주변의 반응에 신경쓸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과 나의 라이프스타일은 다르다. 누구는 스트레스를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해소하지만 누구는 철저히 혼자된 시간으로 회복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에 가치를 두며,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꾸준히 탐구하면서 나만의 기준을 찾는 건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자주 머무는 생각, 좋아하는 공간, 좋아하는 물건과 감사하는 상황, 힘들게 하는 사람의 성향 등 왜 그러한지 관찰하다보니 나의 진짜 욕구가 보인다.
나를 보호하고 싶은데 내게 찌질한 모습이 보이면 실망하게 된다. 단순히 인정받는 것이 나의 욕구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면 나는 유연한 사람이 된다. 성취와 인정은 사랑의 도구일 뿐이니까 성취하지 않아도, 나 이만큼 많이 잘 했어~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으니까. 나다움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욕구를 기반으로 한계와 경계를 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야 지속할 수 있고 넘어지지 않으니까. 이제서야 내 최상위 욕구를 자각했다.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나를 더 사랑하게 됐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브랜드도 결국 사랑이 본질이라고 하지 않나, 내가 브랜드가 되는 길이 먼저 결국 사랑이라고 말하자니 좀 식상하지만 어쩌겠나. 내 욕구가 그런데 인정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