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북꾹

지지 않는 슬픔의 연대기

《검은 꽃》을 읽고

by 마음 자서전


1905년의 봄은 속절없이 잔인했다. 그해 4월, 황성신문에 실린 눈부신 기만(欺瞞)의 광고를 이정표 삼아 1,033명의 조선인이 영국 배 일포드호에 몸을 실었다. 외교관도, 교민도, 돌아올 기약조차 없는 멕시코를 향한 그 먼 항해는 대륙식민회사라는 거대한 인신매매의 서막이었다. 소설 《검은 꽃》은 고국이 지켜주지 못한 백성들이 낯선 유카탄반도의 뜨거운 에네켄 농장에서 어떻게 붉은 선혈처럼 스러지고, 또 끈질기게 피어났는지를 기록한 비극의 서사시다.


1. 묵시록적 풍경: 에네켄 농장의 채무 노예

살리나크루스 항구에 발을 내디든 조선인들을 기다린 것은 금의환향의 꿈이 아닌, 가시 돋친 에네켄(대황란)의 숲이었다. 달빛 아래 은검(銀劍)처럼 번득이는 에네켄 줄기는 그들의 육신을 할퀴고 영혼을 옭아매는 족쇄였다. '아시엔다'라 불리는 농장 시스템은 교묘하고 지독했다. 농장은 생존에 필요한 식료품을 임금보다 비싸게 팔아 이주민들을 영원한 채무의 굴레에 가두었다. 1909년 5월, 4년의 계약은 끝이 났으나 그들의 삶은 이미 돌아갈 길을 잊은 채 유랑의 황야 위에 던져져 있었다.


2.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간군상

김영하는 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놓인 개개인의 삶을 지독하리만치 세밀한 필치로 포착해낸다.

- 김이정, 꺾여버린 낙원의 꿈: 보부상의 '장쇠'에서 멕시코 혁명군으로, 다시 과테말라의 용병으로 흐르는 그의 삶은 소설에서 가장 뜨겁게 박동한다. 이연수와의 짧고 격렬했던 사랑을 가슴에 묻은 채, 과테말라 따갈에 한인들만의 신국(新國)을 세우려 했던 그의 원대한 꿈은 결국 전장의 차가운 흙먼지 속에서 비장하게 꺾이고 만다. 그의 죽음은 나라 없는 백성이 꾸는 꿈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보여주는 처연한 상징이다.

- 박광수, 배교와 신내림의 역설: 바오로라는 성명을 가졌던 신부는 신을 등지고 배에 올랐으나, 결국 신병(神病)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 앞에 무릎 꿇고 무당이 된다. 십자가 대신 방울을 든 그의 삶은 종교적 경계를 넘어 인간이 짊어진 원초적인 업보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 최선길, 악의 평범성: 도둑질과 밀고로 동포의 고혈을 빨아 앞잡이 노릇을 하던 그는 결국 천주교를 증오하는 혁명군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총살당한다. 이는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추악하게 전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단면이다.


- 이종도 가족의 와해: 황제의 육촌이라는 허울 좋은 위엄에 매몰된 이종도가 저물어가는 조선의 고독한 잔상이라면, 스페인어를 익히며 실질적인 삶을 개척한 아들 이진우는 새로운 시대를 견뎌내는 생존의 화신이다.

3. 이연수, 그 불멸의 생명력 혹은 아쉬운 시선

여주인공 이연수는 이 소설에서 가장 극적인 굴곡을 겪는 인물이다. 김이정과의 사랑, 권용준의 집착, 인신매매의 수렁을 지나 이발사 박정훈과의 결합까지. 그녀는 훗날 고리대금업과 유흥가의 거물로 성장하며 비린내 나는 세상에서 오로지 '돈'이라는 힘으로 자신을 무장한다.

다만 작가의 시선이 그녀의 지성적인 개척보다는 성적인 매력과 수용적인 태도에 머물러 있는 듯한 대목은 못내 아쉽다. 그녀가 누군가의 연인이나 아내이기보다, 시대의 언어를 갈고 닦아 당당히 날개를 폈더라면 이 소설은 또 다른 빛깔의 꽃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4. 결말에 대하여: 사라짐으로써 완성되는 이름들

소설의 끝자락, 거창한 꿈을 품고 과테말라로 떠났던 용병들은 전멸하고, 그들의 이상향이었던 따갈은 정글 속에 파묻혀 지도에서 사라진다. 이 허망한 결말은 독자의 마음속에 깊은 소멸의 잔상을 남긴다.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잃은 개인들이 스스로 '국가'가 되고자 했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처절한 투쟁은 결코 헛되지 않다.

한때 뜨거운 열정을 나누었던 연수와 이정도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소설은 우리에게 말한다. 인간은 때로 검은 꽃처럼 어두운 시대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피를 자양분 삼아 피어나야만 한다고. 그 꽃이 비록 향기도 이름도 없이 스러질지언정,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사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검은 꽃》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으려 했던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장엄한 진혼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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