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회와 교육문화의 그림자
베르테르 효과와 한국의 자살 문제: 경쟁사회와 교육문화의 그림자
자살은 개인의 선택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은 오랫동안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해 왔으며, 이는 단순히 개인의 정신적 취약성 때문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특수한 환경에서 기인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리학적 요인인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와 함께 한국 사회의 경쟁구조와 교육문화, 음주문화 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르테르 효과는 독일 작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유래한다. 소설 속 주인공 베르테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여 권총 자살을 택하는데, 이 작품이 출간된 후 유럽에서 이를 모방한 자살이 급증했다. 즉, 유명인의 자살이나 자살 관련 사건이 언론과 대중매체를 통해 자극적으로 보도될 때, 이를 모방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이다. 한국에서도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자살 보도 이후 일반인의 자살률이 급증하는 통계가 여러 차례 보고되었으며, 이는 베르테르 효과가 한국 사회에서도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베르테르 효과만으로 한국의 높은 자살률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요인이 자살을 부추기는 주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은 극심한 경쟁사회이다. 입시, 취업, 승진 등 모든 영역에서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며, 한 번 낙오하면 다시 일어설 기회가 적다. 특히 직장 문화에서도 재도전이 쉽지 않아 실패가 곧 사회적 낙오로 이어진다. 이러한 환경은 좌절을 경험한 사람에게 깊은 절망감을 안기며 자살 충동을 높인다.
이 경쟁의 뿌리는 교육 시스템에 있다. 한국의 학교 교육은 성적 제일주의와 주입식 교육이 지배적이다. 한국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보다 훨씬 긴 시간을 공부하지만, 토론식·탐구식 교육보다는 암기 위주의 학습에 치중한다. 반면 미국은 학생들에게 토론과 탐구를 강조하며, 운동 한 가지와 악기 한 가지를 의무적으로 배우도록 한다. 이는 학생들이 공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특성을 발견하고, 성인이 된 후에도 취미나 생활체육으로 이어져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은 과도한 학업 부담과 주입식 교육으로 인해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즐길 여유가 거의 없다. 이에 따라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 부족하며, 성인이 된 후에도 건강한 취미활동보다는 음주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한국의 1인당 주류 소비량은 세계 2위이며, 음주는 우울증을 악화시키며 자살률을 높이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베르테르 효과를 이해하는 데에는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의 시가 던지는 통찰이 유효하다. 그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남자는 언제나 소유하길 원한다.
시간적으로 볼 때 소유는 미래를 향하여 있다.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하지 못하면 남자의 미래는 닫힌다.
미래가 닫힌 남자는 현재를 견디지 못한다.”
베르테르의 비극은 이 구절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알베르트가 없을 때 롯데는 베르테르에게 열린 미래였으나, 알베르트의 귀환과 함께 그의 미래는 닫혀 버렸다. 미래가 닫힌 베르테르는 현재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생을 포기했다.
한국 사회의 높은 자살률 역시 미래가 닫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절망과 맞닿아 있다. 치열한 경쟁과 낙오 후 재기의 어려움, 주입식 교육으로 인한 획일화된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른 미래”를 꿈꿀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의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언론 보도 방식의 개선이 시급하다. 자살 보도 시 구체적인 방법이나 장소를 언급하지 않고, 자살 예방 전화와 같은 도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이는 자살 예방 효과를 주는 파파게노 효과(Papageno Effect)를 강화하는 길이다. 둘째, 교육 개혁이 필요하다. 토론식·탐구식 수업을 확대하고, 학생들에게 운동과 예술 활동을 장려해 다양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정신건강 서비스의 접근성을 높이고 낙인을 완화해야 한다. 핀란드처럼 무료 상담센터를 확대하고, 정신과 치료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줄이는 캠페인이 필요하다. 넷째, 노인과 청소년 등 고위험군을 위한 맞춤형 지원이 필수적이다. 노인에게는 기초연금 강화와 사회적 돌봄을 확대하고, 청소년에게는 입시 스트레스 완화와 학교 상담 프로그램을 확충해야 한다.
한국의 자살 문제는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문화의 산물이다. 경쟁에서 낙오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 공부 외의 다양한 삶의 가치를 존중하는 교육, 음주 대신 건강한 여가 문화를 장려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아라공의 말처럼, 사람들에게는 미래를 꿈꿀 가능성이 필요하다. 닫힌 미래가 아닌 열린 미래를 제시하는 사회에서만, 한국의 자살률은 비로소 낮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