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글씨 속의 노랑, 그리고 나의 기억
3년 전 서울대학교 분당병원에서 나는 치매 검사를 받으면서 여러 종류의 검사 중에 ‘스토룹 검사(Stroop Test)’라는 낯선 시험을 처음 경험했다. 종이 위에는 단순히 색깔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그 글자와 실제 색은 서로 달랐다. 예를 들어, ‘노랑’이라는 단어는 검정색 글씨로 쓰여 있었고, ‘파랑’이라는 글자는 빨간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글자를 보는 순간 자동적으로 ‘노랑’, ‘파랑’이라는 뜻을 읽었지만, 검사자는 “글자의 뜻이 아니라, 색깔을 말하세요”라고 지시했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80년을 살아오면서 ‘글자를 읽는 것’은 너무나 자동화된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눈에 보이는 색을 말해야 했으니, 머릿속이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입에서는 자꾸 글자의 뜻이 튀어나오려 했고, 그것을 억누르고 색을 말하려니 반응이 늦어졌다. 몇 번은 틀리기도 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점차 익숙해지면서 조심스럽게 정답을 말할 수 있었다.
이 검사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인간의 ‘주의력과 자기 억제 능력’을 평가하는 과학적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 실험은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1935년, 미국의 심리학자 존 리들리 스트룹(John Ridley Stroop)은 사람의 뇌가 ‘자동적으로 읽는 기능’과 ‘의식적으로 색을 구분하는 기능’이 충돌할 때 생기는 방해 효과를 연구했다. 그는 이 현상을 통해 인간의 주의 자원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보여주었고, 그때부터 ‘스트룹 효과(Stroop Effect)’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스트룹 효과는 오늘날 인지심리학과 신경심리검사에서 널리 쓰인다. 치매, 주의력 결핍, 전두엽 손상 같은 다양한 뇌 기능의 문제를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가 받은 검사도 단순히 색과 단어를 맞히는 게임이 아니라, 내 뇌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주의를 전환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검사에서 몇 개 틀린 것이 처음에는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어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동적으로 굳어진 습관을 넘어, 새로운 규칙에 맞춰 반응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 작은 경험은 내게 많은 생각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자동 반응’을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자동성을 멈추고 의식적으로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있다. 스트룹 검사의 순간처럼, 혼란스럽고 느려질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점검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훈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