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평화
투쟁과 도피,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평화
인간의 몸에는 오래된 생존 장치가 하나 있다.
바로 투쟁-도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이다. 눈앞의 위험을 감지하면, 뇌의 편도체가 경보를 울린다. 심장은 빨리 뛰고, 근육은 긴장하고, 혈액은 손과 발로 몰린다. 싸우거나 도망치기 위한 완벽한 준비다. 이 반응 덕분에 인류는 맹수의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맞서는 위험은 맹수가 아니다.
시험, 경쟁, 평가, 비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현대인의 새로운 포식자가 되었다.
그래서 한국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투쟁-도피 상태 속에 놓여 있다.
학교는 전쟁터가 되었다.
입시라는 이름의 전쟁에서 아이들은 잠시도 쉴 수 없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 “떨어지면 끝이다”라는 말이 마치 생존의 법칙처럼 각인되어 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과와 효율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사람들은 서로를 경쟁 상대로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투쟁 반응이다.
신경계는 끊임없이 ‘위협’을 감지하고, 몸은 늘 싸움의 모드로 긴장한다. 결국 사회 전체가 예민해지고, 누군가를 밟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의 기본값이 되어버렸다.
오늘 나는 음악회에 갔다. 공연이 끝나고 Q&A 시간에 지휘자가 물었다.
“오늘 음악회에 처음 오신 분, 손들어보세요.”
놀랍게도 객석의 3분의 1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마음이 묘하게 서늘했다.
우리는 이렇게나 오랫동안 문화의 문밖에 서 있었던 것일까.
한국 사회는 늘 경쟁에 내몰려 문화생활을 즐길 여유가 없다. 퇴근 후엔 지친 몸을 겨우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주말은 피로를 풀기에도 부족하다. 그 사이, 마음을 이완시켜줄 예술과 여유는 희미해졌다.
미국은 한국보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다문화국가다. 그런 미국에는 오히려 한국보다 극심한 갈등이 나타나는 걸 근래에 보지 못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초등학교 때부터 1인 1운동, 1인 1악기를 배운다. 어릴 때 익힌 운동은 생활체육이 되고, 악기는 평생의 친구가 된다. 그래서 동네마다 체육관이 있고, 조그만 오케스트라도 있다. 직장에서 일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 모여 합주를 한다.
이런 생활체육과 생활예술이 바로 사회의 ‘완충 장치’이다. 투쟁으로 달아오른 몸과 도피로 얼어붙은 마음을 다시 이완시켜주는 사회의 자연 치유력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 완충지대가 부족하다. 일과 경쟁 사이에는 숨 쉴 틈이 없고, 예술과 운동은 일부 계층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 같다.
투쟁의 사회는 사람들을 예민하게 만들고, 도피의 사회는 사람들을 고립시킨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충’과 ‘회복’이다.
싸움과 도망을 잠시 멈추고, 함께 노래하고, 걷고, 웃을 수 있는 공동의 리듬을 되찾는 일.
그것이 문화이고, 예술이며, 삶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흑백논리가 팽배한 세상에서는 모든 게 옳거나 그르거나, 편이거나 적이다. 토론은 싸움이 되고, 타협은 비겁함이 된다.
이런 사회는 늘 긴장 속에 산다. 결국 모두가 이기지 못하면 지는 전쟁 속에서 공동체는 서서히 피로해진다.
이제는 멈춰야 한다. 투쟁-도피의 회로를 끊고, 협력과 이완의 회로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를 밟고서 올라가는 대신, 서로의 어깨를 빌려 함께 오르는 사회. 이기는 것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사회.
그 길의 출발은 거창하지 않다. 동네 음악회 한 번, 주민들과 즐길 수 있는 다양하고 저렴한 생활체육 시설, 그 속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평화의 리듬을 되찾을 수 있다.
투쟁도, 도피도 아닌 공존의 길. 그것이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진짜 생존의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