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뽑기 장애trichotillomania,
여름이었다. 두 대학 교수, 김 교수와 이 교수가 해수욕장을 찾았다.
햇살은 뜨겁고 바다는 파랬다. 바닷바람 속에서 두 교수는 모래사장에 앉아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김 교수의 눈에 이 교수의 종아리가 들어왔다. 거기엔 유난히 길고 굵은 털 하나가 다른 털들 사이에서 고개를 쑥 내밀고 있었다. 이 교수는 그것이 거슬리는지 손가락으로 털을 집어 뽑으려 했다.
그러자 김 교수가 물었다.
“아니, 그 털은 왜 뽑나?”
이 교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 털이 말일세, 유난히 잘난 척하는 자네를 닮아서 말이야. 괜히 성가셔서 뽑으려 했지.”
김 교수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나 닮은 그 털을 내가 사겠네.”
“허허, 그걸 왜 사나?”
“내 걸 닮았으니 내게 줘야지.”
두 사람은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흥정 아닌 흥정을 했고, 결국 이 교수는 종아리의 그 ‘잘난 털’을 김 교수에게 팔았다. 이 교수가 다리를 만지작하며 털을 뽑으려 하자 김 교수가 손을 내저었다.
“지금 뽑지는 말게. 나중에 내가 직접 뽑아가겠네.”
그러고는 그 털 위에 작은 표시를 해두었다. 마치 자기 물건에 이름을 적어두듯이.
그 뒤로 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김 교수는 꼭 이렇게 물었다.
“내 털, 잘 있나?”
그러고는 표시된 그 털을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았다.
이 교수는 늘 투덜댔다.
“인제 그만 가져가게. 뽑아가든지 말든지.”
하지만 김 교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아니네. 때가 되면 뽑아가겠지.”
그 털은 그들의 우스갯소리와 함께 한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때때로 아주 사소한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상징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감정과 관계를 조용히 확인한다.
이 교수 종아리에 난 털 하나도 그랬을 것이다. 태양빛 아래서 반짝이던 그 작은 털은 본래 그저 신체의 일부였다. 그러나 두 교수의 농담 속에서 그 털은 어느새 ‘잘난 체하는 털’이 되었고, 또 ‘김 교수의 털’이 되었다. 대수롭지 않은 장난이었지만, 그 한 가닥은 둘 사이의 유쾌한 관계를 매개하는 물건이 되었다.
김 교수가 “내 털 잘 있나?” 하고 묻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그 말속에는 대단한 의미가 없지만, 완전히 아무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아직 친구지?” 하고 은근히 확인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친밀한 관계는 이렇게 사소한 대상 하나를 중심으로 유지되곤 한다. 함께 웃었던 사건, 작은 농담, 누구만 알고 있는 기호, 별것 아닌 우스갯소리. 그런 조각들이 관계를 묶는 실마리가 된다.
털뽑기 장애를 떠올리면 이 이야기는 더욱 대비가 선명해진다. 털뽑기 장애에서 털은 마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손끝이 붙잡는 마지막 끈이다. 불안한 마음은 말 대신 행동으로 표현되고,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털은 희생된다. 그 순간 털은 유머의 대상이 아니라 고통의 통로다. 뽑히는 털은 그저 털이 아니라, 말로 하지 못한 감정의 파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 교수와 이 교수의 털은 정반대였다. 그 털은 두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이어주는 부드러운 끈이었다. 뽑으면 사라질 털을 굳이 남겨둔 것은 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털에 얹힌 관계의 의미 때문이다. 어쩌면 김 교수는 털이 뽑히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털이 남아 있는 동안은 두 사람의 익살스럽고 어린아이 같은 관계도 함께 유지되었으니까.
이 두 모습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건 단순하다. 사물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털이든 돌멩이든 종이 한 장이든, 의미는 언제나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어떤 털은 고통의 언어가 되고, 또 어떤 털은 웃음의 언어가 된다.
같은 털이지만, 마음이 다르면 세상에 놓이는 위치도 달라진다.
나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은 거대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존재이지만, 그 의미의 재료는 언제나 아주 작다.
더러는 털 한 가닥처럼 작고, 더러는 지나가는 말 한마디처럼 가볍다.
그러나 그 작은 것들이 모여 우리의 관계를 만들고, 우리가 느끼는 고통을 설정하고,
우리가 품는 애정을 드러낸다.
그래서 털 한 가닥이든, 조그만 장난이든, 반복되는 습관이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어낸다.
김 교수의 “내 털 잘 있나?”라는 말은 사실 털의 안부가 아니라, 관계의 안부였다.
그는 털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두 사람 사이의 즐거움이 여전히 살아 있는지를 확인한 것이다.
한편 털뽑기 장애가 있는 사람의 손끝은 “나 지금 괜찮니?” 하고 자신에게 묻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말로 다 하지 못한 긴장을, 털을 통해 토로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머가 아니라, 생존이다.
이렇게 털 한 가닥의 의미가 극단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삶의 많은 장면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관계를 만들고, 무엇으로 마음을 달래며, 무엇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는가.
그리고 때때로, 그 모든 것은 정말이지 아주 작은 것 하나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