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성 정체 장애
사람은 가끔 자신을 벗어나 다른 모습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낯설고 새로운 얼굴을 써보고 싶은 마음, 마치 오래 입던 옷을 벗어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색깔을 걸쳐보고 싶은 마음. 그러나 인생은 쉽게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기억의 층, 상처의 흔적, 기쁨의 결 위에 놓여 있다. 그 긴 시간의 결을 무시하고 하루아침에 새로운 얼굴로 살아간다는 건 결국 자신을 버리는 일에 가깝다.
한때 ‘이중인격자’,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말은 모욕에 가까웠다. 사람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으로, 부정과 위선을 상징했다.
정치인을 향해 “얼굴이 몇 개냐?”고 조롱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상은 사람의 일관성을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누구에게나 상황에 따라 표정과 말투가 달라지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장사꾼은 이익 앞에서 얼굴을 바꾸고, 정치인은 표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린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기대라는 거울 앞에서 눈빛을 달리하고 목소리를 다듬는다.
이 얼굴의 변화는 위선이 아니라, 어쩌면 시대가 요구하는 또 하나의 생존 방식인지도 모른다.
심리학자 로버트 리프턴은 이런 인간의 특성을 ‘프로테우스적 자아’라 불렀다. 그리스 신화 속, 순간마다 다른 모습으로 변하며 바다를 누비던 신 프로테우스처럼 우리는 시대와 관계, 역할에 따라 자신을 재구성하며 살아간다. 회사에서의 나는 바람 앞의 대나무처럼 단단해야 하고, 집에서 나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몸을 낮춘다. 친구 앞에서는 다시 부드러워지고, 홀로 있을 때는 오래된 나의 그림자와 마주 앉는다.
이 다양한 얼굴들은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실은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여러 결일 뿐이다.
흐르고 흔들리되, 결국 하나의 자아 아래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는 흐름. 이것이 프로테우스적 자아의 건강한 유연성이다.
그러나 어떤 얼굴의 변화는 이러한 유연성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다. 상처가 너무 깊고, 고통이 너무 날카로워 마음이 그것을 온전히 끌어안지 못할 때 생겨나는 균열. 이것이 해리성 장애의 세계다.
해리는 말 그대로 ‘분리’다. 기억이 분리되고, 감정이 잘려 나가며, 정체성의 일부가 잠시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다. 상처받은 마음은 고통을 견디기 위해 자신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어딘가에 감춰둔다. 그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버텨내기 위해 선택된 마지막 생존 전략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혼란과 두려움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 채 깨어나고, 어떤 이들은 자신 안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리듯 정체성이 흔들린다. 이것은 역할의 변화가 아니라, 정체성과 기억의 구조가 파편처럼 흩어지는 비극이다. 프로테우스의 유연한 변화가 아니라, 상처가 남긴 균열을 따라 흘러내린 어둠의 그림자다.
우리는 대개 마음의 병을 잘 모른다. 우울함이 스쳐 가도 “이 정도쯤이야”라고 넘기고, 불안이 밤마다 가슴을 조여도 병원을 찾는 것은 마지막 순간이다. 아파도 말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와, 정신의 문제를 외면해 온 문화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자기 내면에서 벌어지는 균열을 홀로 감당한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침묵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천천히 피어나
결국 삶 전체의 결을 바꿔놓는다.
우리는 모두 여러 얼굴과 함께 살아간다. 프로테우스의 얼굴들은 우리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끈다. 그러나 상처가 만든 얼굴의 분리는 언젠가 반드시 돌보아야 할 고통의 신호다.
중요한 것은 얼굴의 개수가 아니다. 그 모든 얼굴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 있는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내가 나로서 견딜 수 있는가이다.
프로테우스의 유연함과 해리가 남긴 균열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기 안의 여러 얼굴을 껴안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