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끄는 사람들, 그리고 남은 질문들
나이가 들수록 나는 도덕보다 인간을 먼저 보게 된다.
젊은 날에는 무엇이 옳은지,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르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나 세월이 쌓이면서 알게 되었다. 사람은 늘 옳음 속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외로움과 욕망과 우연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간다는 것을.
<미세리코르디아>를 보며 나는 오래전 읽었던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떠올렸다.
뫼르소는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뜨거운 햇빛이 눈을 찔러 방아쇠를 당겼다고.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는 세상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슬퍼하지 않았고, 변명하지 않았고,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카뮈는 그를 통해 말하고자 했다. 인간은 논리보다 먼저 존재하며, 세계는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이성적이지 않다고.
제레미 역시 그렇다.
그는 분명 살인을 저질렀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악인도 아니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범죄자도 아니다. 그에게는 순간이 있었을 뿐이다. 젊은 날의 나는 그런 인물을 쉽게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본다. 인간은 때로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윤리보다 먼저 몸의 충동과 감정의 파동에서 일어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굽이진 산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카메라를 보며, 나는 삶의 귀향을 생각했다.
우리는 늘 어디론가 나아간다고 믿지만, 어느 순간 이미 정해진 원 안에서 맴돌고 있음을 깨닫는다. 제레미는 떠나려 하지만 떠나지 못한다. 숲과 식탁, 침대를 반복해 오가며 그는 점점 더 좁은 세계 속으로 스며든다. 젊음은 앞으로 달려가지만, 인생은 결국 어떤 장소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법이다.
숲에서 자라난 버섯은 죽음 위에 피어난 생명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세월을 생각했다. 누군가의 상실 위에 또 다른 관계가 자라난다. 비극은 끝나지 않았는데, 식탁은 차려지고 사람들은 먹는다. 인간은 그렇게 살아간다. 카뮈가 말했듯, 세계는 부조리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부조리 속에서 빵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누군가의 손을 잡는다.
목욕 장면은 당혹스러웠다.
젊은 날의 나였다면 그 장면을 외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수치심도, 도덕도, 외로움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죽은 아들의 어머니와 젊은 남자의 발기된 몸이 한 화면에 놓일 때, 나는 그들이 욕망에 사로잡힌 괴물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공허를 안고 선 인간처럼 보였다. 인간은 비극 속에서도 살아 있는 몸을 느낀다. 그것이 부끄러운 진실이다.
영화의 마지막, 두 사람이 한 침대에 눕고 불을 끈다.
도덕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카뮈는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부조리를 인식하면서도 살아가야 한다”고.
제레미와 마르틴은 정의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온기를 선택한다.
그것은 고귀하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그러나 인간적이다.
불을 끈다는 것은 무엇일까.
진실을 덮는 일일까, 아니면 더 이상 판단하지 않겠다는 체념일까. 나이가 들수록 나는 확신보다 질문을 붙든다. 삶은 언제나 명쾌한 결말을 주지 않는다.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채로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더듬는다.
<미세리코르디아>는 내게 정의를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이 부조리한 세계를 이해한 채로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