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시대에 손을 내민 사람

버려진 왕 곁에 선 남자, 엄흥도

by 마음 자서전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나서, 머릿속에 남은 건 의외로 “왕”이 아니라 “호장”이었다.

엄흥도. 영월 호장 엄흥도.


단종하면 계유정난, 사육신, 복위 운동… 이런 굵직한 이름들이 먼저 튀어나온다. 칼 들고 뛰어다니는 사람들, 권력 잡는 사람들, 쓰러지는 사람들…. 그런데 보면 시선이 옆으로 빠져. 큰 무대 뒤편에서, 누가 조용히 뒷정리했는지는 잘 안 보이는데 이 영화는 뒷정리한 사람이 주인공이다.


영월 청령포는 정말 묘한 곳이다. 물이 삼면을 감싸고 절벽이 남은 한 면을 막고, 소나무 숲이 빽빽하고…. 그때 단종에겐 그냥 천연 감옥이다. ‘궁궐 속의 섬’에서 ‘산속의 섬’으로 옮겨 간 거다.


영화는 사건 설명을 막 늘어놓기보다, 단종의 겪었던 비극을 유헤진의 웃음으로 승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 500만 관객이 모이는 것 같다.


홍수 걱정 때문에. 청령포에서 동헌 객사로. 거기서 단종이 마지막을 맞는다는 이야기를 따라가면, 영화가 왜 자꾸 “시간”을 보여주려 하는지 이해가 된다.

단종의 비극은 칼날 한 번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쌓여서 오는 거니까.

근데 진짜 마음을 꽉 잡는 건 죽음 이후의 이야기이다.


단종이 죽고 시신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걸 엄흥도가 모셨다. 여기서부터는 “역사”이자, “사람” 얘기가 된다. 그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역모자 취급받는 왕의 시신을 거두는 건, 괜히 손대면 집안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는 일. 그런 상황에서 영월 호장 엄흥도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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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한테는 이게 영웅놀이가 아니라, 그냥 못 지나치는 일이었다. 측은지심이라고들 말하지.

남의 아픔을 보고 모른 척 못하는 마음.

이후 엄흥도는 후환이 두려워 영월을 떠났다.


“선을 행하다 화를 입는다면, 이는 내가 달게 받겠다.”

모두가 말렸지만,

“의리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취할 수 있는 거다”라고 했다던 대목도 이후 역사에 기록된 엄흥도의 말이다.

엄흥도는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는다.


엄흥도가 한 일은 당대에는 모두가 두려워했던 일이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오는 칭찬…. 늦어서 더 짠한 박수를 주는 것 같다.


영화 보고 나서 영월 풍경을 다시 생각하는 사람들이 영월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영화에는 단종의 쓸쓸함과. 엄흥도의 결단을 볼 수 있다.

영화는 유해진의 유머러스한 연기가 돋보인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