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함의 심리학 – 영화 〈씨너스: 죄인들〉을 읽다

보이지 않는 차별, 끝나지 않은 분노,〈씨너스: 죄인들〉속 흑인의 역사

by 마음 자서전

영화 <씨너스: 죄인들> 감상문

흑인들의 초기 이주는 이민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폭력이었다. 아프리카의 땅에서 이유도 모른 채 끌려와, 이름을 잃고 언어를 잃고 가족을 잃었다. 인간이 아니라 노동력이 되었고,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공정하게 기울어 있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인생 전체를 빼앗긴 경험. 그 억울함은 한 사람의 기억으로 끝나지 않고, 세대를 건너 집단의 기억으로 남았다.

노예제가 폐지되었다는 말은 종결처럼 들리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법은 바뀌었으나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교육의 문은 좁았고, 취업 기회의 문턱은 높았다. 차별은 채찍과 족쇄에서 사라졌지만, 대신 보이지 않는 벽이 되었다. 같은 행동을 해도 더 의심받고, 같은 실수에도 더 가혹한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그 모든 불합리에 대해 돌아오는 말은 늘 같다. “네가 예민한 거야.” 그렇게 감정마저 무효화된다. 부당함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설명도 사과도 책임도 없다.

해결되지 않은 부정의는 시간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분노로 남는다. 이 분노는 병이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이고, 정의가 회복되지 않았다는 경고다. 그래서 흑인들의 분노는 과잉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된 부당함에 대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억울함은 잊으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말해지고, 인정되고, 다뤄질 때에야 비로소 끝나기 시작한다.


영화 <씨너스: 죄인들>은 뱀파이어라는 장르적 장치를 선택한다. 피를 빨아 생존하는 존재들. 감독은 이 괴물을 통해 자본과 권력, 교육의 구조 속에서 흑인들이 어떻게 피를 빼앗겨 왔는지를 은유한다. 알게 모르게 흘린 피, 빼앗긴 시간과 가능성, 누적된 상실의 역사다. 이 영화 속 뱀파이어는 공포의 대상이기보다 구조 그 자체다.


영화에 대한 관객 반응은 이 작품이 누구의 이야기인지 분명히 보여준다. Post Trak과 Nielsen 자료에 따르면 관객의 49%가 흑인이었고, 백인은 27%였다. 숫자는 말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스크린 위에서 마주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많은 흑인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위안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몇 해 전 미국 워싱턴에서 여러 기념관과 박물관을 찾았던 적이 있다. 그중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곳은 흑인박물관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동물처럼 배에 실려 오던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마지막 공간에서 성공한 흑인들의 영상이 흐른다. 대통령, 가수, 배우, 작가, 학자들.

그러나 마지막 출구에 서 있던 문장은 이 모든 성취 위에 그림자처럼 남아 있었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 차별은 존재한다.”


흑인의 역사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지만, 한국인들 역시 하와이 농장 등지에서 선조들이 고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보다 더 차별받는 집단이 아시안이라는 말도 있다. 그럼에도 아시안의 집단적 억울함을 이렇게 강렬한 은유로 풀어낸 영화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영화 속 뱀파이어는 솔직히 혐오스럽다. 그래서 이 영화가 동양권에서 환영받지 못한 이유도 이해된다. 이 이야기는 흑인의 역사와 직접 맞닿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공포는 보편적이지만, 억울함의 결은 다르기 때문이다.

억울함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역사가 남긴 흔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심리학적인 의견을 하나 덧붙인다.

흑인들이 겪어온 역사에는 외상후 격분장애(Post-traumatic emvitterment, Disorder PTED)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정서가 깔려 있다. PTED는 생명의 위협을 겪은 뒤 나타나는 공포가 아니라, 부당함과 모욕, 설명 없는 피해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때 생기는 지속적인 분노와 억울함을 말한다. 핵심은 트라우마 그 자체보다도, 정의가 회복되지 않았다는 감각이다.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법은 바뀌었지만 구조는 그대로였고, 차별은 노골적인 폭력에서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모습을 바꿨다. 교육과 기회는 제한되었고, 같은 행동을 해도 더 의심받고 더 엄격한 평가를 받았다. 그 부당함을 말하려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그렇게 분노와 억울함은 설명되지 못한 채 마음속에 쌓여갔다.

이처럼 해결되지 않은 부정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분노로 남아 현재를 살아가는 몸과 감정 속에 반복된다. PTED의 관점에서 보면, 흑인들이 느끼는 분노는 과도한 감정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된 억울함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다. 병이 아니라 신호이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역사적 경고다.

억울함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희미해지는 감정이 아니다. 말해지고, 인정되고, 다뤄질 때야 비로소 정리되기 시작한다. 흑인들이 겪어온 분노와 격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책임지지 않은 역사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후보군에 올랐다는 소식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이는 한 집단의 고통을 넘어, 해결되지 않은 부정의가 어떤 모습으로 남는지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흑인 인권을 위해서뿐 아니라, 아직 말해지지 않은 모든 억울함을 위해서도 이 영화가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