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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하루 한 줄

삶에서 느낀 철학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by 마음 자서전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김형석, 김영사, 2018, 180713)

100세가 된 철학자이다. 대학교에서 가르치던 철학에서 생활에서 느낀 철학을 글로 썼다. 우리의 삶에 철학은 없고, 경쟁만 있다고 철학자는 느끼고 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발전을 위하고 있지만 정작 조직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질은 나아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에서도 잘 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일류대학 진학률을 높이고 있지, 성적이 낮은 학생을 위한 지도에는 소홀하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다리를 놔준다. 길을 깔아준다고 하지만, 국회에는 더 많은 돈을 쓰고 있고, 복지시설이나 도서관 등에는 소홀하다고 말한다. 정치인의 정책도 양적으로는 풍성하지만 질적으로는 검증되지 않고 마구 쏟아낸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들을 철학적인 배경으로 말하고 있다.


100세가 되어서도 매일 글을 쓰고 한달에 몇 번은 강연을 다닌다. 안병욱 교수 등, 동료들은 없어 외로울 만도 한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매일 수영을 하면서 건강을 지킨다.

교회에 다니지만 성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다. 성도라기 보다는 교인이라고 불러야 맞다고 한다. 성도(聖徒)라는 말을 거룩한 길을 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실제 그런가?라고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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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생활이 빈약한 사람들은 혼자만 있게 되면 곧 고독을 느낀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생활이 풍부한 사람은 언제든지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항상 자신과의 대화의 시간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정신력이 빈약한 반면, 생리적 자아가 강하기 때문에 또 하나의 육체를 가진 타자를 찾아 스스로의 고독을 메우지 않을 수 없다. 45---

그러나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을 피한다. 또 결코 오랜 시간을 군중 속에서 보내지 못한다. 대중 속에는 정신적으로 깊이 있는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깊은 사상은 정신적 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정신이 자란다는 것은 고독이 자란다는 뜻이다. 키르케고르의 ‘그가 지니고 있는 고독의 척도가 곧 그의 인간의 척도’라는 뜻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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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국회의원도 병원이나 학교를 먼저 지어주고, 기다렸다가 국회의사당을 짓자고 요청한 사람이 없었다. 그 속에는 많은 그리스도인과 불교 신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의식구조를 고치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 같다. 하물며 국민들의 가난은 외면한 채 예배당 짓기에 열중하는 교회 지도자가 있다면 더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경제 문제가 잘못되면 다른 모든 문제가 병들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는 직접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 짓기 위해 뛰어들지는 않아도 그 선한 해결과 성장을 위해서 언제나 새로운 방향과 이상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특히 보육원이나 양로원 같은 사회사업에 열중하면서 사회경제 전체의 진로나 국민경제의 기본적인 방향을 그르치는 과오를 범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이웃을 돕고 교회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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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젊은 신학자 본회퍼는 히틀러를 트럭을 몰고 질주하면서 많은 시민들을 죽이거나 부상시키는 정신병자로 보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은 그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바라보고만 있지 그 정신병자를 트럭에서 끌어내려 더 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줄 생각은 못하고 있다는 견해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히틀러 제거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고 사형을 당한 것은 양심적인 애국자로서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성직자들은 목사가 어떻게 암살음모에 가담할 수 있었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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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을 소중히 여기는 교육자가 있다면 모든 학생이 다 제일이라는 평을 해야 할 것이다. 모든 학생이 자기 소질과 취미에는 제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똑같을 수 없고 또 똑같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교육이란 어린이의 능력을 계발해주며 선한 의지와 신념을 뒷받침해주는 일이다. 그 선의의 뒷받침은 모든 학생에게 필요하며 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열등감과 좌절을 느끼는 학생일수록 더 많은 칭찬과 성장을 위한 후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앞서는 학생보다는 처지는 학생들이 더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도록 하는 것이 교육적 책임일지 모른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모두 깊은 반성에 잠겨야 하겠다.

'과연 나는 꼴찌인 어린이에게 상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있는 교육자가 되고 있는가?’라고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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