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하여》
《용서에 대하여》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남순, 동녘, 2017, 180704)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 교수이다. 국내에 여러 미디어에 기고를 하고 있다. 한국과 영국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책에서 내가 감명 있게 읽은 것은 자기용서이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준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피해자이지만 또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내가 가해자였을 때는 자기 용서를 하면서 내가 피해자였을 때의 용서는 다른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지적 이해가 자기 용서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진정한 자기 용서가 가능하려면 이성과 합리성만이 아니라 감성의 측면에서도, 즉 가슴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때 비로소 온전한 의미의 자기 용서가 가능해진다.’ (116쪽)
자기 용서는 자신의 어떤 잘못된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계속할 때도 자신에게는 너그러우면서, 타인이 잘못된 습관에는 너그럽지 못하다. 때문에 용서의 출발점은 자기 용서에서부터 시작된다.
타자에게 상처를 주는 식으로 그릇된 행동을 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피해자가 외부인이 아니더라도 스스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 게임 중독에 빠지거나 끝없이 시간을 낭비하면서 습관적으로 할 일을 못하고 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 자기 존중, 자존감, 자기 신뢰가 깨어지고 자신에 대한 불신과 혐오에 이르기까지 한다. (106쪽)
용서란 이처럼, 커다란 폭력, 상처, 잘못 들이 발생했을 때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매우 사소해 보이는 다양한 일들 속에서도 인간관계와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 본능적 분노
폭력이나 상처에 대한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이런 분노나 분개는 아이와 어른은 물론, 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는 자신에게 육체적 고통이 주어졌을 때 즉각 나타나는 반응으로, 도덕적 성찰이 개입되지 않는다. ---
본능적 분노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에서 유발되며 여기에는 어떤 성찰이나 윤리적 숙고도 개입되지 않는다.
- 성찰적 분노
어떤 잘못된 행위에 성찰적⋅도덕적으로 분노하는 것이다. 본능적 분노에 머물지 않고 분노의 원인을 사유하면서 그 분노가 과연 정당하지, 왜 그러한 분개의 감정을 품게 되는지 성찰하고 난 후에 생기는 분노다. 따라서 성찰적 분노는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분노와는 달리, 어떤 사건이나 누군가의 행위에 대한 부당함⋅불의함⋅불공평함 등의 윤리적 판단을 반영한다.---
누군가가 ‘고의적 행동‘ 으로 한 개인이나 집단이 부당한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 한해 성찰적 분노가 생긴다.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이 파괴되고 안녕이 위협을 받으면 인간은 성찰적 분노를 하게 된다. 그런데 고의적 행위로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성찰적 분노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피해자가 인식하는 데 따라 성찰이 없는 경우도 있다. 또 피해가 일어난 구체적 정황에 따라 피해 상황에 대한 성찰적 분노 유무나 반응이 매우 다를 수 있다.
- 파괴적 분노
파괴적 분노는 본능적 분노나 성찰적 분노가 지나치게 커짐으로써 증오-원한-복수로 전이되는 것이다. 이렇게 변모되는 분노는 반(反)종교적이며, 반(反)도덕적이다. 이런 파괴적 분노야말로 용서와 양립할 수 없다. 성찰적 분노와 파괴적 분노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분노의 근본적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찰적 분노는 ‘부당한 행동’이라는 행동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에 파괴적 분노는 부당한 행동보다는 ‘행위자’를 향한다. 즉 부당한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로 전이된다. ‘나는 당신을 증오한다.’라는 표현은 가능하지만, ‘나는 당신을 분노한다.’라는 표현은 어법에 맞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나는 당신의 행동을 분노한다.’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49-55
- 단념 모델
전통적으로 용서란 우선 용서하는 사람이 분노를 단념하고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계속 분노를 느끼면서 그를 용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이른바 ‘단념 모델’이라 부른다. ‘분노의 단념’을 용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용서에 대한 이해는 이런 단념 모델에 근거한다.
단념 모델은 인간이 느끼는 분노의 감정이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다. 앞서 논의했듯이 분노의 층과 색채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인간이 느끼는 모든 분노의 감정이 하나의 똑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고 전제한다. ---
- 덕목 모델
단념 모델의 한계를 넘어서는 용서의 다른 모델이 바로 ‘덕목 모델’이다. ‘도덕적 의무로서의 용서’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에 근거한다.
첫째, 용서는 인간으로서의 의무다. 용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안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언제나 다양한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에 노출된다. 이에 따라 인간은 자신을 포함한 타자를 늘 용서할 수밖에 없다. --- 물론 여기에서 의무로서의 용서를 진정한 용서로 불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둘째, 타인을 용서하고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인류의 보편적 선의지와 분노는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면서도 여전히 그 잘못에 분노를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노가 타인을 향한 인간의 자비심을 파괴하는 ‘파괴적 분노’일 때, ‘도덕적 의무로서의 용서’와 양립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한 모든 분노를 단념할 필요가 없다는 버틀러의 주장은 중요하다. 63
- 용서의 적절한 대상
용서할 대상이 불분명하거나 적절치 않게 설정된다면, 용서라는 중요한 행위와 덕목이 잘못 행사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타당한 근거도 없이 누군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들에게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 사람을 용서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예) A의 형이 부모로부터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시샘하는 경우
- 용서의 적절한 정도
적절한 대상이 분명해지고 난 후에는 용서의 ‘적절한 정도’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용서를 한다고 해도 용서자의 마음속에 남을 수 있는 분노, 또 연민과 자비의 감정이 어느 정도일지 가능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 용서의 적절한 시기
데이트 상대방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하자, 그런데 폭력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도 데이트를 할 때마다 안전에 위협을 느끼고 불안하다면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를 용서하기에 적절한 시기라고 볼 수 없다. 71
- 용서에 적절한 동기
용서는 기계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용서의 동기가 무언가 분명히 규명해야 한다.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위협하는 가해자의 행위에서 피해자는 분노를 느낀다. 그 분노 너머의 용서는 단지 용서를 위한 용서가 되어서는 안 되며, 피해 상황이 종결되고 치유되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72
- 용서의 적절한 방식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벌어진 잘못된 일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 분노가 전혀 없다면 사실상 용서할 필요도 없다. 73
첫째, 가해자는 잘못된 사건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자신의 행위가 옳지 않았고 자신에게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며 이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같은 가해자의 책임의식이 부족하다면 주어진 용서에는 ‘묵인’의 의미만이 남는다.
둘째,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가 왜 옳지 않았으며,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행위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행위를 스스로 비판한다는 것은, 가해자가 이제 잘못을 행한 사람과 ‘동일한 사람’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셋째,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인지하고 이를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 후회는 단순하게 일반화된 ‘잘못’이 아니라 구체적 정황에서 구체적 내용이 지닌 것이러야 한다.
넷째, 가해자는 앞으로 상처를 입히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져야 하며, 그러한 의지는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용서를 구할 때는 필수적으로 가해자의 믿을 만한 변혁이 동반되어야 한다.
다섯째, 가해자는 자신의 관점이 아닌 ‘피해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위로 인해 피해자가 어떤 피해와 상처를 받았는지 이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 90
양심이나 도덕적 성찰이 결여된 사람은 극심한 가해를 하고도 굳이 자신의 행위에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91
피해자: 용서하는 사람의 변화
피해자는 ‘피해자 의식’에서 벗어나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의식과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겠다는 변화의 ‘주체자agent의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진정한 용서에서 요청되는 용서하는 사람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