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데리고 살기 너무 힘들 때.

글맛: 씁쓸한. 어떻게 맛이 바뀔까요? 삶의 레시피를 연구해 가는 중.

by 뻔뻔한 주인장

뭔가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 됐어요.

음… 사실 알고 있었지요. 아주 오래전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약간의…(?) 문제들을 라벨링을 하자면 아주 많겠지만요.

그중에서 일단 한 가지만 골라 얘기한다면요.

ADHD요.


성인 ADHD에 대한 얘기가 화두로 떠오르기 전부터요.

전 알고 있었어요. 저의 다른 점을요.

그치만 엉뚱하게도 전 저의 그 남다른 특징이 내심 자랑스러웠답니다.

이리저리 통통 튀는 생각과 행동들이 제 창의성의 원천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말이에요!


요즘엔 점점 더 살기가 버거워지는 거 있죠.

내가 나를 데리고 살기가요…. 휴우.


ADHD의 특성 중에 하나인…

물건 잃어버리는 일은 놀랍게도 거의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있는 일이지만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건 바로 그날이었어요.


"와, 이 옷 너무 예쁘다."


늘씬한 마네킹이 입고 있는 하얀 롱원피스는,

제가 쇼핑몰에 아웃도어를 사러 갔단 사실을 까맣게 잊게 만들었고요.


전 순식간에 원피스와 나, 오직 단둘만 존재하는 진공상태로 들어가 버렸지요.

누가 낚아챌 세라 당장에 값을 지불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더랬죠.


거울을 보니 자석처럼 손뼉이 착 맞붙더라고요!

어머나. 세상에.

이건 분명히 나를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옷이 아니겠어요?!


옷이 너무나 마음에 든 저는 직원 분께 바로 택을 떼어달라 부탁하고,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며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왔어요.


물론 아~무 문제가 없었지요.

입고 간 옷을 두고 왔다는 사실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에요.


놀랍게도 일주일 후에야 사라진 옷의 행방을 기억해 낸 저는,

서둘러(표현이 맞을진 모르겠지만….) 매장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여기서 퀴즈~!

매장으로 가는 도중에 제가 몇 번을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까요…?

힌트를 드리자면…, 가는 길에 챙겼어야 할 물건만큼이랍니다.


핸드폰을 두고 와서 들어갔다가,

그 바람에 다시 지갑을 놓고 오고.

지갑을 가지러 다시 들렀다가 이어폰을 두고 나오고.

음악을 들으며 가야 한다는 생각에 꽂혀 또다시 발길을 돌렸는데.

나오는 길에 이번엔 가스밸브를 잠갔나 안 잠갔나 너무 걱정이 되는 게 아니겠어요. 하아.

(여기서 눈치채셨겠지만 강박증도 있는 것 같아요, 저. 엡솔뤁을리…. 그리고 또… 읍읍.)


그렇게 다시 무한 도돌이표 같은 기묘한 왕복 운동을 반복하다가.

정말이지 나중에는 기진맥진해서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더라고요.

치매가 아닐까 걱정도 심히 되고요.


정말 누굴 부양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달랑 나 하나 데리고 살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냐고요. 흐엉엉.


크흡. 하지만 제가 아무리 뻔뻔한 주인장이라도 말이지요.

귀한 손님들 초대해 놓고 푸념글로 맺어버리면 절대 아니 되지요.


그래서 전 고민했어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씁쓸한 인생의 맛이 바뀌려나 하고요.

그리하여 그날로 부단히 삶의 레시피를 연구해 왔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원치 않는 불청객 맛들이 더 많이 끼어들었지만요.

그래도… 성과가 아주 없던 건 아니에요!


2024년의 새해가 밝자, 저는 거대한 다짐을 했고.

결국 평생 미루고 미루던 숙제 같은 무려 방청소를 해냈거든요!!

'에이, 겨우 방청소 가지고?'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중증 ADHD인 저에게는 아주 거대한 실천이었어요.


밀림 같은 제 방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모를, 아주 오래되고 넝쿨지고 얽힌.

온갖 신비한(=쓸데없는) 물건들이 즐비한 거대한 동굴 탐험 수준이었거든요.


옷과 물건이 너~무도 많아서 매일 같이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는데요.

바로 괴로워 하기와 시간 낭비하기예요.

아침마다 입을 옷을 고르고, 머릿속으로 코디해 놓은 옷을 찾기 위해 동굴더미를 뒤지고.


하지만 당연하게도 머릿속으로 고른 하루의 세팅은 분명 못 찾기에.

(상의에, 하의에 양말에 속옷에 액세서리 등등 깨야 할 퀘스트가 너무도 많아!)

아침에 못 찾은 옷과 물건들은 하루종일 찜찜하게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을 지저분하게 유영하고 다녔지요.


그래서 제게는 거대한 실천이 된 거예요.

실상은 방청소,라고 쓰고 방 안에 있는 물건 3분의 2 이상 버리기 실천이었죠.

전 저를 돕겠다고 나선 사랑하는 전우 두 명을 소환해 아주 뜻깊은 전쟁을 치렀어요.


그리고 약 한 달째 유지 중인데, 이제 확실히 깨달았어요.

남은 짐이 10분의 1이 될 때까지 더 가져다 버려야겠다고요!(진심)


정말이지, 방청소는 머릿속 정리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몸만 큰 아픈 아이 데리고 살기가 꽤나 힘들지만, 뭐 어쩌겠어요.

남은 생 동안은 이러나저러나 싫으나좋으나 데리고 살아야 하는 것을요.

넘어야 할 산이 무척이나 험준할 예감이 들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아주 지대한 명언이 있잖아요?


생각만 하던 일들의 초입구에 드디어 발을 들여놓았으니, 이제 어떻게든 올라서야겠지요.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가야지요.

토끼를 역전해야 한다 스스로 다그치는 거북이는 되고 싶지 않고요.

하루에 한 걸음이라도 뗀 것에 칭찬해 주는, 이왕이면 나에게 다정한 거북이가 되어보고 싶어요.


P.S

아참. 이건 절대로 비밀이 아닌데요.

거북이는 다음 걸음으로, PT 등록을 했어요... 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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