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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 Jun 17. 2017

물의 도시, 스톡홀름, 그리고 오슬로.

북유럽의 여름, 붉은 하늘.


말뫼에서 스톡홀름까지는 몇 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생경하지만 빠르게 지나갔다. 중간중간 또 비가 흩뿌렸다가 개었다가 했다.



Stockholm C, 중앙역에 도착해 숙소를 찾기 위해 지하철로 향했다. 스톡홀름의 교통카드 격인 SL Access 카드에 72시간동안 사용가능하도록 충전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역에서 숙소를 가려면 10분 정도를 걸어야했다. 스톡홀름 중심을 지나는 강가 아래 쪽에 있는 호스텔은 선실을 개조해 만든 것이었는데, 호스텔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는 길 내내 날씨가 너무 좋아 빨리 짐을 던져두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새삼스레 그런 기분도 참 오랜만이구나 싶었다.



도착한 호스텔의 선실을 개조해 만들어둔 방은 혼자 사용하는 싱글룸이었는데, 침대가 벽에 고정되어 있는 방식으로 2층 침대 위치에 있고, 창이 고정형이라 열리지 않아 굉장히 답답한 느낌이었다. 방 안엔 세면대가 있었지만 화장실과 샤워실이 바깥에 별도로 있었고, 전체적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하루만 숙박을 예약한 상태여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을 정도로.


하루 묵었던 호스텔



날씨 탓일지, 내내 흠뻑 젖은 것만 같던 축축한 발이 답답했던 탓이었을지, 기분 전환같은 걸 하고 싶었다. 투박한 여행가방 안에는 '언제 어느 때 신을지 몰라'라며 사실은 말도 안 되게 챙겼던 짐인 하이힐 샌달이 있었다. 지금이 이 때다 싶어 신이 나서 신고 나왔던 샌달은 잠시동안 햇살이 비춘 스톡홀름 시내를 또각거리며 누볐다. 건너편에 보이는 구름이 말 그대로 두둥실 떠 있었고, 하늘은 파랬다.



시작은 좀 산뜻했을지 몰라도, 감라스탄 쪽으로 길을 거닐게 되면서 힐을 신은 걸 탓하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조각조각 나뉜 돌길로 이루어진 구 시가지로 향하는 길은 한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웠지만 내 발을 묶기에는 충분했다. 급기야 숙소를 나온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슬리퍼든 뭐든 편한 신발을 찾기에 바빠졌다. 감라스탄 구시가지를 지나 보이는 백화점에 들어가 쪼리를 하나 집어들었다. 힐을 신은 채로는 돌길을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던 데다가 덴마크에서 로스킬레페스티벌에 갔을 때 텐트밖에 두었던 쪼리를 누가 집어갔기 때문에 안 그래도 슬리퍼류가 필요하던 차였다(라고 결국은 합리화).





사람처럼 걸을 수 있게 된 후, 바삐 지나갔던 감라스탄 구시가지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다시 둘러본 감라스탄은 좁은 길들 사이로 숍이 줄지어 있고, 아주 좁은 계단이나 언덕으로 구석구석 길이 이어져 있었다. 거기에 노란, 빨간색으로 외벽이 칠해진 예쁜 건물들과 노천에 앉아 햇살 아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노라니 이 곳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스톡홀름, 이렇게 좋은 곳이었다니. 예상보다 하루 늦어진 바람에 스톡홀름에 있을 수 있는 시간도 하루 짧아진 셈이었고, 그게 벌써부터 아쉬워질 줄이야.


감라스탄의 오후



스톡홀름엔 의외의 것이 두 가지 정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스웨덴 브랜드인 줄 몰랐지만 알고보니 스웨덴 브랜드인 유명 브랜드가 많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스톡홀름 시내에만도 박물관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다. H&M, IKEA, ACNE 등이 모두 스웨덴 브랜드이고, 그래서 매장들도 매우 큰 편인데다가 곳곳에 굉장히 많이 있었다. 그리고 박물관은 노벨박물관, 바사박물관, 스칸센, 노르딕, 현대사진박물관, 무민박물관 등이 있어 무슨 박물관을 찾아가면 좋을지 고민이 좀 되었다.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갈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고, 결론적으로 찾아간 박물관은 스톡홀름의 가장 힙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사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꼭 가야겠다 싶었던 현대사진갤러리 Fotografiska, 그리고 타이타닉보다도 더 빠른 시간에 침몰한 바사 배를 전시해둔 Vasamuseet에 들르기로 했다. 바사의 경우 이 배에 대한 중요성이나 역사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거나 한 건 아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세월호 사건과 다르지만 왠지 겹쳐보이면서 가봐야 할 듯한 마음이 이상한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일었다.




어떤 배보다도 아름답고 웅장하게, 하지만 탐욕스럽게 만들었던 배 바사가 출항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다 한 가운데로 가라앉았을 때, 그 배를 인양해 거의 95% 정도를 복원해 배 본체를 전시한 이 박물관에서는 구체적인 배의 장식부터 당대의 복식, 배에 실었던 물건에서부터 사고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나 궁에서 그 때의 사고를 누구의 탓으로 돌릴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있었던 것까지 구체적으로 전시해두었다. 이 곳에서 그 큰 배를 쳐다보며 든 생각은, 단순하게 그 배의 웅장함과 이를 복원해둔 스웨덴 사람들의 노력에 대한 대단함보다도, 그 과거의 실수로부터 온 반성의 시간과 수치스러울 수도 있는 역사 자체를 드러냄으로써 과거의 사건을 오늘 날에도 누구나 올바로 볼 수 있도록 구현해둔 그 용기가 대단하다는 것이었고, 그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왜 누군들 실수라는 것을 안 할 수는 없지만,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드러내기까지의 고민은 누구나 괴롭고 시간이 걸리는 문제일텐데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까지의 결정을 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고민이 동반되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300년이 지나 바다에서 그 선체를 꺼낼 때부터 현재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시되어 주목을 받기까지 그런 고민을 거듭했을 스웨덴 사람들이 대단해보였다.





이튿날 들렀던 사진 갤러리인 Fotograsfika에서는 전쟁을 겪으며 신체의 어떤 결함을 얻게 된 사람들의 뒤틀리고 적나라한 사진을 보며, 또 케이트모스를 비롯한 패션계, 연예계 사람들의 사진으로부터 오는 이질감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섞여 머릿 속이 혼란스러웠다. 스스로에 대한 기준에 차라리 가혹해지더라도 사회에서 주는 기준에 기대어 가혹해지지 않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어느 새 나는 나에게도 사회적 기준을 갖다대겠지,하는 복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밤이 늦게 오는 감라스탄으로 다시 돌아가 옛날의 바이킹 역사를 재현해둔 펍에서 옛 그들과 같은 식사(주방이 닫기 직전이었는지 '이 메뉴 주문하면 반값에 해줄테니 주문할래?'라고 해서 홀리듯 주문한 엄청난 양의 바이킹식 저녁. 기본적으로 고기에 칼을 수직으로 꽂은 채로 갖다주는데, 뭔가 수렵형 인간이 된 느낌이었다.)를 하고 나니 스톡홀름에서의 둘째 날이 어느 새 지나가고 있었다.




또 다른 날의 또 다른 숙소에서 눈을 떠보니 북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스톡홀름에서 오슬로를 가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왠지 아쉬워진다. 겉핥기만 하고 가는 스톡홀름은 아무래도 못내 아쉬워 다시 찾을 수 있다면 그 땐 조금 넉넉히 일정을 잡아 오리라, 생각하며.



오슬로 호스텔 예약을 아직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친다. 계획이 있어도 매번 실행하며 이동해야 하는 여행을 하게 되면 가끔 뭘 완료했는지, 뭘 해둬야 하는지 자주 잊는다. 그런데 대부분 일이 벌어지기 전엔 마무리되니 발을 동동 구르는 건 사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더라. 유럽에 와서 런던에 살며,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느낀 건 '서두르고 있는 건 나 혼자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너무 불안하고 답답하고 급한데, 모두들 여유를 가지고 모든 문제를 대해 가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기차를 타고 닿은 노르웨이 오슬로는 바다를 두고 빙 둘러져있는 마을같았다. 어딜 가나 항구 쪽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이 이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켓에 들러 식사를 챙겨먹고, 미술관을 들러 뭉크의 그림을 조금 보고 나서 주변의 카페,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걸었다.



자유롭게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물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보고 그것을 종이에 옮기는 그림이 각각 다른 모양새로 나타난다는 게 왠지 흥미로웠다. 어디선가 북유럽에서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뭐든 하되, 과제에서 벗어나게끔 하면서 본인이 '니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실현하게끔 만드는 것이라 들었는데, 여기서는 그게 실제로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에서는 노력하면 언젠가 가능할 거라는 희망고문을 하지 않는다. 그건 각자의 길이 다르고, 그를 발견하게 하기까지의 판단도 본인이 하기 때문에 획일적인 교육으로 같은 길을 걸으며 서로 비교하지 않는 것일 거다.





유독 길에 놓여있는 자전거가 눈에 띄었다. 심지어 예쁘다. 이 곳에서 디자인이라는 것은 그냥 이 사람들의 몸에 배어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생활방식이나 눈에 드는 생활방식이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피요르드를 볼 수 있는 작은 마을들을 배를 타고 가보기 위해 길을 찾았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라 지나가는 사람에게 피요르드를 어떻게 가는지 물어보는데 그 사람의 답이 오리무중이었다.


"피요르드? 피요르드가 여긴데 어딜 말하는 거야?"


알고 보니 '피요르드'가 노르웨이 말로 '물'이라는 뜻이라고 해 피요르드를 간다고 하는 내 말 자체가 잘못 된 거라는 거였다. 그럼 왜, 피요르드를 '피요르드'라 이름한 걸까. 어찌 되었든, 그 '피요르드'라 하는 곳을 찾아서 섬과 섬을 연결하는 대중교통격인 배편을 타고 이동하는데 재밌는 건, 이게 무슨 유람선이나 페리 같은 거라기보다도 그냥 통근 선박과도 다름없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우리와는 다른 모양을 갖고 있는 누군가 혹은 어떤 곳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 곳을 찾아가고 매혹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거기에서 한 평생을 산 사람에게 그 풍경이란 그리 놀랍지도, 생경하지도 않은 것이리라. 날 둘러싼 그 곳의 풍경이 이상하리만치 전 세계의 사람을 모이게 할 뿐이라는 것 정도로 인식되겠지. 그게 꽤나 운이 좋은 것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살며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할까.




두번째 섬으로 이동하는 동안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몇 개의 섬을 모아둔 이 피요르드는 각각의 섬마다 별장처럼 생긴 집들이 있거나 얕은 바다에서 가족들이 해수욕을 하고 있었다. 비오는 섬에서 시간을 보내며, 여름동안 잠시 방문한 듯한 사람들의 여가 시간을 훔쳐보기에 이른다. 나는 노르웨이에서 잠시동안 peeping tom이 된다.





섬에서,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의 일상을 훔쳐보노라니, 이제 다시 떠나야할 여정이 다시 내 눈 앞에 놓인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다시 오슬로 시내로 돌아오니 시끌벅적한 소리가 도시 한 가운데서 울려퍼진다. 소리를 따라 가보니 유로2016 경기를 보기 위해 큰 스크린을 설치한 공원에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술을 마시며 함께 경기를 관람 중이었다. 사람들을 따라 축구를 보는 동안은 나도 좀 더 푸릇푸릇했다. 북유럽의 싱그러운 여름도 이렇듯 지나가고, 떠나야 할 길은 새로운 과제로 나에게 다시 주어지는 느낌이었다.






트램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아직 여행은 반도 더 남았어'라고 스스로 되뇌이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가방을 꾸린다. 새벽에 나가야 할 일정이라 잠을 빨리 청해 잠을 좀 더 자야 하는데, 오히려 잠이 오지 않는다.


이건 어떤 설레임일까 아니면 부담감일까.

아니, 그냥 잠이나 좀 더 자자.





눈을 감으니 아까 비가 오던 그 섬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하다. 후두둑 떨어지던 비가 바닷물에 맞닿았을 때 물소리, 그리고 섬에서 돌아와 축구를 보기 위해 모인 인파들 사이로 붉게 물들었던 하늘.




그 붉은 하늘이 내 눈 앞에 아른거렸던 이유는 뭐였을까. 그저 오랜만에 보는 예쁜 하늘이어서만은 아니었을테고, 그 겹겹의 색을 가진 하늘이 이 곳을 기억할 단서가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하루를 겨우 머물렀던 날이 아쉬워 또 이 곳을 찾으리라 생각했던 오늘은 후에 다시 현실이 될까. 그 현실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 때는 조금 더 잘 누리리라는 의지 또한 마음 한 켠에 접어놓았다. '보고 싶을 거야, 다시. 언제가 되었든 다시 만나, 꼭.' 그렇게 누군가에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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