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묵지는 어디에 남는가?
필자가 AI와 관련된 업을 하다 보니, AI 시대의 업에 대한 대화를 지인과 많이 나누게 됩니다.
이를 정리해 작가님들과 아래와 같이 나눔합니다.
AI에 대한 이야기에서 가장 흔히 등장하는 문장은 이것이다.
“AI가 인간의 일을 대신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어딘가 불편하다.
정확하지만 동시에 비어 있다.
AI는 실제로 많은 일을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수행한다.
보고서를 쓰고, 코드를 만들고, 이미지를 생성하고, 상담 문장을 제안한다.
이제 “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문제는 오히려 그 다음이다.
그래서, 무엇이 인간의 일로 남는가?
AI 시대의 질문은 ‘대체’가 아니라
‘선별’과 ‘재정의’에 가깝다.
우리는 흔히 업을 직업이나 직무로 이해한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업은 단순한 역할이 아니다.
업이란 오랜 시간 반복된 선택과 판단의 총합이다.
같은 매뉴얼을 읽어도 결과가 다른 이유,
같은 데이터를 봐도 결론이 갈리는 이유,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있다.
바로 암묵지(tacit knowledge)다.
암묵지는 문서로 정리되지 않는다.
교재에도, 회사 매뉴얼에도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숙련된 상담가가 느끼는 고객의 미묘한 불안
장인이 손끝에서 감지하는 재료의 상태
리더가 회의실 공기에서 읽어내는 결단의 타이밍
이것들은 경험을 통해 체화된 판단이다.
“왜 그렇게 했는지” 설명은 가능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알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할 수 있지만, 이 암묵지는 여전히 완전한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다.
AI는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기술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대신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는 기술이다.
AI가 잘하는 일은 명확하다.
반복 가능한 판단
규칙이 정의된 문제
결과가 정답에 가까운 영역
반대로 AI가 쉽게 넘지 못하는 영역도 분명하다.
맥락을 읽는 판단
관계를 고려한 선택
책임을 동반한 결단
이 경계에서 AI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 판단을 정말 기계에게 맡길 수 있는가?
아니면, 이것은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인가?
AI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결정의 책임은 여전히 인간에게 남는다.
AI는 가능성을 나열한다.
그러나 무엇을 선택할지의 기준은 인간이 만든다.
결국 인간의 일은 점점 이렇게 이동한다.
실행 → 판단
처리 → 해석
생산 → 의미 부여
업의 본질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힘” "무엇을 왜 하고 싶은지 정의하는 힘" "실행 결과가 하고자 하는 방향에 부합되는지 판단하는 힘"이 된다.
AI 시대에 암묵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왜냐하면,
명시적으로 설명 가능한 영역은 AI가 가져가고,
설명되지 않는 영역만이 인간의 고유한 가치로 남기 때문이다.
업이란 결국,
AI가 대신할 수 없는 판단을
얼마나 성실하게 축적해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AI는 인간을 밀어내지 않는다.
대신 거울처럼 묻는다.
“이 판단, 정말 너의 것인가?”
AI 시대의 업은 더 가벼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
왜냐하면 판단의 이유와 책임이 점점 인간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질문은 단 하나다.
우리는 무엇을 끝까지 인간의 일로 남길 것인가.
그리고 그 일을, 그 암묵지를 다음 세대 인간에게 어떻게 잘 전달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