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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과장 Dec 29. 2021

팀장님 우리는 어떤 유통 회사인가요?

마켓컬리 인사이트를 읽고 나서

며칠 전 농산물 협력사 운영 방안에 대한 보고서 준비 지시가 급하게 내려왔다. 윗분들이 기대하는 방향과 필자 생각 사이 존재하는 간극 앞에서 주저하다 보니 오늘도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맞춰 PC를 끄고 서둘러 몸만 사무실을 빠져나오지만 머릿속 가득한 질문들은 그대로다. 어떤 업체가 좋은 파트너일까?


유통(流通), 문자 그대로 물품을 직접 제조하지 않고 외부에서 매입해 일정 이윤을 붙여 판매하는 비즈니스다. 공급사, 소비자, 유통 업체가 주요 Player이고, 제각기 이윤 동기는 다르다. 그간 삼각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쪽은 대개 유통 업체였다. 고객에 대해서는 품질과 가격에 대한 정보 우위를, 공급에 대해서는 고객에게 접근할 수 있는 지위의 우위를 그리고 이 두 우위를 활용해 유통사는 자기 이윤을 만들어 나간다.


소위 '나까마'로 불리는 단순 벤더 시장은 진입 장벽이 높지 않다. 반면 기업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유통 비즈니스는 다르다. 엄청난 기반 투자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규모의 경제와 방대한 인프라를 기반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품질 유지가 핵심 역량(Core Value)이기 때문이다. 고부가 가치 창출보다 고정 비용이 큰 시장 안에서 그간 주요 기업들은 대량 구매로 원가를 낮추고 재고 운영 효율에 사활을 걸어왔다. 그래서 공급 업체도 하나의 자산으로 간주되었고, 협상 방식은 대체로 일방적이었다.


식자재 유통(B2B) 기업은 농산물 주요 매입 주체로서, 대량 매입 규모 활용한 Buying Power는 높은 편에 속한다. 게다가 공급자 입장에서 단체 급식과 외식 채널 거래선 기반 고정적인 물량 수요는 농산물의 변동성을 흡수해 줄 수 있는 좋은 완충제이다. 그런데 온, 오프라인 유통 업계 지형이 급격히 변하고, 전통적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면서 기존 유통 강자들이 보유한 부동산, 물류 인프라 및 전산 체계 등 확고한 인프라 우위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그리고 가장 보수적인 영역이었던 신선 식품마저 이커머스 채널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간 농산물의 안정적인 매입처인 식자재 시장의 입지도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마켓 컬리는 공급사와 더불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상품'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윤의 제로섬(Zero-sum) 게임을 고객 만족의 포지티브섬(Positive-sum) 게임으로 바꿔낸 것이다. <김난도, 마켓컬리 인사이트 >


이커머스 농산물 유통 전략은 협력 업체와 새로운 관계 정의를 이해하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네이버 스토어는 상생 차원에서 벤더들에게 마케팅에 도움이 될 만한 빅 데이터 툴을 무상으로 지원한다. 구매자가 어느 지역, 무슨 연령대, 어떤 시간대에 구매했는지를 상품 별로 한눈에 알기 쉽게 제공한다. 덕분에 똑똑해진 농가 사장님들은 더 이상 대기업 유통 MD에 말에 의존하기보다 적정가 설정부터 물량 배분 계획까지 주도적으로 변해간다. 마켓 컬리의 경우, 소외된 산지와 농가를 발굴하고 자신들의 플랫폼 안에서 전략적 육성에 집중한다. 컬리만이 가진 고객 정보와 정교한 타겟팅을 더해 상품 고유의 스토리를 더한다. 방법은 달라도 그들 모두 단순 판로 확대뿐만 아니라, 공급 업체 입장에서 가진 케케묵은 갈증까지도 해소시켜준다.


대형마트 3사의 경우도, 고객 집객 강화의 묘안을 그래도 자신 있는 농산물에서 찾는 듯하다. 요즘 마트 입구에 들어서면 온통 자체 발굴한 지역 농산물과 차별화 품종을 홍보하는 문구가 대부분이다. 농산물 유통 르네상스 시대, 온, 오프라인 가릴 것 없이 유통 기업들은 모두 고객 유인만큼 우수 벤더의 확보에 승패의 키가 있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식자재 유통 업계는 농산물 포함 구색 상품 차별성이 대동소이하다 보니, 어느 한쪽으로도 마진 축소에 대한 가격 전가가 어렵다. 이를 타게 하기 위해 내세우고 있는 부가 서비스 패키지마저도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충성 고객 확보와 신규 고객 Lock-In 전략은 경영진 보고서에만 볼 수 있는 신기루와 같이 요원해 보인다.


시장의 낡은 패러다임 고수는 전체 구매 교섭력 감소로 이어졌다. 전반적인 농산 원물 거래량 감소 등 채소 소비 패턴 변화와 시세 급등락 빈도수 증가로 인해 B2B납품 매력도는 떨어지고, 클레임 대응 부담까지 가중되면서 농산물 유통 업계 젊은 사장님들 중심으로 새로운 판로로 눈을 돌리거나 업종 전환을 꾀하고 있는지도 오래되었다.


유통 업계 오래 몸 담고 계신 어느 대표님께서 필자와 술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유통 기업은 본디 우선 공급사가 가장 큰돈을 벌 수 있게 하고, 그다음 소비자가 충분한 구매 만족을 얻게 한 뒤, 마지막에 유통 회사가 적정 이윤을 탐해야 한다. 그래야 그 기업이 오래간다. 당시에도 막연하게 좋았던 말씀은 곱씹어보니, 골드만삭스에서 애용하는 Long-term Greedy(장기적 탐욕) 개념과 맥락이 닿는다. ,  단기적으로는 기회 손실처럼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기업을 흥하게 한다는 뜻이다. 아직도 많은 유통 대기업들이 정보 비대칭을 활용해 형편없는 상품으로 고객에게 폭리를 취하고, 구매에선 공급사에 대해 상품 가격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이에 가격에 대한 수요가 비탄력적인 농산물은 늘 예외 없이 남용되었다.


농산물 포함 신선 제품 구매 경쟁력은 B2B 유통 기업의 명운을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성은 더 커질 게 분명하다.

그런데 박리다매 로직이나 대기업 거래 실적만 내세워 우수 벤더를 편하게 유인하는 시대는 지났다. 1차원적 상거래 관계를 넘은 새로운 무언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게 필요하다. 다행히도 시중에 참고할만한 좋은 사례들이 많다.


우선 보고서부터 급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필자 스스로 시간을 갖고 마저 고민 좀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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