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다섯, 마당이 생겼습니다 #1
마당 딸린 집을 짓는 건 엄마의 오랜 꿈이었다.
푸릇푸릇 키를 키우는 잔디에 물을 주는 일, 어디선가 날아온 홀씨가 틔운 잡초를 골라 뽑고, 마당 한편에 텃밭을 가꿔 채소를 기르는 일.
오래된 꿈, 갓 한 달 된 현실.
엄마는 27살 아빠와 결혼 후 상경해 나를 낳았고, 내 동생을 낳은 31살부터 쉰 다섯 봄까지 쭉 아파트에 살았다. 아파트는 깔끔하고 편하지만 단지 살기 위한 생활의 공간일 뿐, '집' 같지 않았다는 게 지난 20여 년에 대한 엄마의 총평이다. 어린 시절 살던 시골집 마당의 작은 화단이나 마루 위에서의 공기놀이 같은 것들이 늘 그리웠다며 이렇게 말했다.
"평생 아파트에만 살다 죽고 싶지는 않았어"
누군가 이미 정한 대로 지어진 다 똑같은 모양의 집. 재미는 없지만 편한 게 사실이다. 집 짓기에 대해 아는 게 전무해도 최소한의 퀄리티를 보장받을 수 있고, 지형, 가스, 수도, 인테리어 같은 머리 아픈 것들을 고민할 필요도 적다. 개인이 집을 짓겠다면 업체를 낀다고 해도 지역을 선정하고, 땅을 물색하고, 잘 모른다고 혹시 당할지 모를 덤터기를 걱정하며 공부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 잠깐만 생각해도 쉽지 않고 막막한 일이다.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20여 년 전의 엄마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전원일기'를 촬영한 실제 동네 방문이었다. 무려 30년을 넘게 방영한 국민 연속극 '전원일기'를 보다가 엄마는 아빠와 저런 마을에 집을 짓고 고즈넉하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처음 나누었다. 그리고 티비 속 그 마을이 양평 어드메에 자리하고 있으며 매물도 많이 나와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호기롭게 부동산까지 방문한 것이 두 사람의 기나긴 집짓기 여정의 시작이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나. 양평 시골 마을이라고 만만히 생각했던 두 사람은 부동산에서 읊어주는 땅값에 뜨악했다. 가물한 기억으로 당시 땅값은 평당 200 정도였으나, 매물로 나온 땅이 모두 최소 몇백 평 단위로 감당키 어려운 금액이었다. 집을 지으려면 몇 평 정도의 땅이 필요한 지 감도 없던 뜨내기들은 그렇게 씁쓸하게 아파트로 귀가했다.
실패로 돌아갔다고 내디딘 첫 발이 거꾸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꿈에 부풀었으나 솔직히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을 고려하면 양평 시골마을로 이사를 가는 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은 시작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공부를 많이 해둬야겠다고 결심했다. 신문에 게재되는 주택 분양 단지 광고는 모두 챙겨보며 반드시 전화를 걸었다. 가까운 지역이면 방문해서 터를 살펴보면서 괜히 맨땅도 밟아보았다. 내 땅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첫 양평 방문 시 봤던 땅들이 집을 짓기엔 너무 큰 땅이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시골 땅들은 대부분 소분해서 나누어 팔지 않고 통짜로 땅을 내놓는 탓이었다. 그러면서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할 것 없이 어디든 길을 다니다 예쁜 동네, 좋은 집이 보이면 무조건 차를 돌렸다. 부동산이 있으면 볼 수 있는 집이 있는지 물었고, 없으면 멀리서나마 구경을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상상했다. 내가 이 동네에 집을 짓는다면 어느 터에 지었을까. 저런 곳엔 집을 지으면 산그늘이 져서 해가 짧겠다. 마을 초입에 있는 집은 차가 많이 다니고 시끄러울 수 있겠구나. 저런 마당에 잘생긴 나무를 한 그루 심으면 조경이 참 좋겠다. 이런 마을에 혼자 집을 지어서 들어온다면,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몽상에 가까울지 몰라도 그런 상상이 즐거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로또 한 장 품에 찔러 넣고 한 주를 살아낼 힘을 얻는 기분이었을까. 나도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나를 가끔 데리고 다니며 "이런 마을에 살면 어떨 것 같아? 학교는 멀어. 좀 걸어 다녀도 학교 마치면 마당에서 뛰놀 수 있어' 하고 여러 번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 나 학원 안 가도 돼? 공부 안 해도 돼?" 하고 내가 되물었던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