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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구 Oct 08. 2020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감정의 영속성

감정이 변하지 않으리라 믿은 적이 많다. 문장으로 뱉어내고 보니 더더욱 멍청해 보이지만, 진심으로. 조금 더 오버하면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 순간순간 나 역시 치기 어린 생각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에서는 '그래도 이건 아닐걸?'이라고 은근히 뻗대곤 했다. 




인간적으로 참 좋아한 사람이 있었다. 저런 사람을 만나게 되어 나는 참 복이 많은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은근한 자랑도 꽤나 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최근엔 지나가는 그의 맨들한 뒤통수만 봐도 꿀밤을 먹이고 싶은 기분이 들 만큼 미워하게 되어버렸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으면 괜히 시간을 끌며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그가 사라져 버릴 때까지 기다렸고, 그 역시 내가 보이면 접근금지 명령이라도 처분받은 듯이 화들짝 놀라며 후다닥 자리를 떴다.


호감이 미움으로 바뀌었을 때 약간의 충격과 씁쓸함을 느꼈지만, 이 맹렬한 미움이 다른 무언가로 다시 변질될 일은 죽어도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떻게 그와 다시 말을 섞고 웃으며 얼굴을 마주하겠나. 그러나 사회생활이 무엇인지 완벽한 거리두기란 불가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 일 없었단 듯이(!) 즐겁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너무 뻔뻔한 거 아니냐.. 싶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대본과 전혀 딴판인 감정으로 연기하는 배우를 눈 앞에 둔 감독처럼 어이가 없는 기분이었다. "이 장면에 웃음이 왜 나와? 정신 안 차릴래?!"라고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이미 구멍 난 독이었다. 아무리 NG를 외쳐도 마음이 돌아서지 않으니, 작가에게 대본 고쳐야 할 것 같다고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꽤나 지독했던 불행감에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즐겁고 명랑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 신나게 새 선글라스를 사들고 여행을 떠나던 밤. 조금 늦었던 체크인 탓에 자리가 저 멀리 떨어져 버린 애인과 오랑우탄 같은 수화로 떠들며 낄낄 대다가 문득 옛날에 써두었던 메모 하나를 보게 되었다. 


과거에 내가 느꼈던 막막함, 무력감, 괴로움이 녹아있는 짧은 일기였다. 그런데 읽고 나니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었던 거야? 별 일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불쑥 떠올랐다. 마음에도 입이 있다면, 실언한 사람마냥 그 입을 부여잡을 뻔했다.


감정이 영속하지 않아 주어 천만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어떻게 당시의 감정을 그렇게 가볍게 치부할 수 있나 어이가 없었다. 남보다 못한 수준인데? 이 정도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어디선가 댕강 부러져 버린 게 아닌가.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 사이엔 심연 같은 우주가 놓여있고, 내가 나였다는 중요한 증거인 기억조차도 바스라져 효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습게도 카페라떼마냥 커피처럼 씁쓸한 기분 위로 따뜻한 안도감이 섞여 들었다. 감정도, 나도 영속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불행감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무기력함, 나아가 그 감정이 내 존재의 근원인 건 아닐까라는 자기 의심이었으니. 영원한 것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라고 과거의 내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런 순간이 또 찾아온데도 아무리 단단하게 느껴진데도, 부러뜨려버리고 다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나를 꼭 지켜줄 것이라고. 감정도 나도 유한하다는 걸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니 이상하게 용기가 생겼다.




이 드라마의 주인은 배우이지 감독이나 작가가 아니니. 배우 맘이 바뀌면 대본도, 장르도 모두 바꾸면 그만이다. 앞 씬에 '킹덤'이었던 것이 다음 컷에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된 들 관객은 나 하나. 나만 좋으면 장땡이지.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이든, 싱그러운 꽃길이든 그저 뚜벅뚜벅 걸어가면 된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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