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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구 Apr 14. 2022

꿈이 없는데 진로를 어떻게 정해요

꿈은 찾는 것이 아니다

너한테는 간절함이 없어


선배가 돌직구를 던졌다. 대학 졸업이 머지않았는데 도대체 뭘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아무것이나 쑤시고 다니는 나에 대한 일침이었다. 간절하게 원하는 꿈이 있다면 그렇게 우왕좌왕하지 않을 것이며, 발가락이라도 담갔다면 그때부턴 간절하게 갈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맞다. 그가 말한 간절함이 내겐 없었다. 그다지 원하지도 않는 것에 간절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만 내가 간절했던 것이 있다면 정보였다. 세상에 대한 정보, 그리고 나에 대한 정보. 남편 얼굴도 모르고 시집가서는 평생 봉양하는 아낙네의 삶도 아니고. 내 평생이 달라질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인데, 그 무엇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간절해질 수가 있는지 나는 그것이 더 이해가 안 된다고 대꾸했다.




간절함은 없지만 백수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닌 내가 취한 전략은 이랬다. 내 유일한 자산, 시간을 있는 힘껏 투자하는 것. 너무 내 것이 아닌 것은 과감하게 소거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더더욱 가지기 어려우며, 간절함을 흉내 내 어떻게 가진대도 잘하기 어려울 것들. 이를테면 많은 친구들이 선망하는 제조업의 영업/마케팅 직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는 맞지 않았다. 


대신 내가 '좋아할 것 같은' 것들을 더 열심히 기웃거렸다. 글쓰기 수업을 들었고, 미술이 좋다는 이유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미대의 미술사며 미술 비평 전공 수업을 수강했다. 그러다가 우연찮은 기회에 온라인 미술 비평 잡지에 작가로 합류했고 거기에서 연이 되어 1년 간 전시 기획과 언론 홍보를 하러 뛰어다녔다. 


별다른 보수도 없이 중세 시대 수습생 마냥 이리저리 치이지만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업계의 분위기. 아는 작가 한 명, 작가 한 명 없는 초짜로 시작해서 조금씩 얼굴도 알리고 전시도 더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 견디기에는 쉽지 않은 시간과 잠들기 힘든 밤이 쌓이고, 마침내 그 마음조차 완전히 졸아들어 탄내가 진동할 즈음 결국은 포기를 선언했다.




우울했다. 적지 않은 시간을 들였는데 진심으로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희소하고, 좋아할 것 같았던 것들도 결국은 싫어지는 굴레가 무서웠다. 그래도 그 1년의 시간 안에서 내가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면, 콘텐츠는 미디어의 변화와 함께 진화한다는 것. 그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하고 실험하며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역사의 한 줄을 남겼다는 것.


지금 보면 너무나 뻔한, 고작 그것을 배우기 위해 그렇게 긴 시간을 썼다고 하면 조금은 우습기도 하지만.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고 어쨌든 그 경험은 내가 가지고 있던 설익은 로망을 싹둑 제거해주면서도 앞으로 집중해야 할 화두를 던져 주었다.


그렇다고 바로 멋지게 삶의 갈피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한참을 더 방황했다. 디지털 뉴스 전문 매체가 되겠다던 언론사에 들어갔다가 도무지 가망이 없어 보여 퇴사했고(실제로 얼마 되지 않아 폐간했다), 대신 요즘 시대에 누가 신문을 보나며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다. 아침마다 주요 일간지의 메인 기사를 카드 뉴스로 요약해서 올렸고, 각종 경제 뉴스를 쉽게 설명해주는 영상도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앱을 만들어봐야겠다며 연습장에 열심히 서비스 플로우 기획서를 그렸다. 코딩을 할 줄 알아야 되겠다며 코딩도 배웠다.




이 방황이 끝이 날 수 있을까? 내가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걸까? 역시 간절함이 없는 게 문제인 걸까? 꿈,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마케팅에 속아 허무맹랑한 무지개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많은 자기 의심과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방황 속에서 내가 '일'에서 추구하고 싶은 키워드는 점점 뚜렷해졌다. 콘텐츠, 디지털, 기획, 그리고 월급. 그제야 마침내 제대로 된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위의 키워드를 포괄하는 기회들을 찾아나갔고 입사지원서를 100개씩 뿌리는 세상에 5개 남짓한 이력서만을 손에 쥐고 '취업' 시장에 처음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한 게임회사에 합격하게 되었다. 모두가, 그리고 나 조차도 이번에도 꽝이면 어쩌지 하고 두려웠지만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을 마침내 만나 근속상도 2번이나 받았다. 과거를 돌아보며, 그때 내가 기회라고 생각했던 일, 사람들의 현재를 돌아보며 깨달았다. 내게 맛난 사과를 길러내는 능력은 없었을지 모르나, 상한 사과를 골라내는 능력만은 꽤나 나쁘지 않았다는 걸. 다만 적당히 타협하는 법을 도무지 모르기 때문에 그 괴리를 메꾸기 위해 맨 땅에 헤딩하는 그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어찌 보면 선택은 쉽다. 좀 빈 구석이 있대도 그 순간에 눈을 감으면 선택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일상에는 에누리가 없다. 매일 그 빈 구석과 함께 살아가야 하고 어찌어찌 못 본 채 가려둔 대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빈 구석을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물론 그런 쉬운 선택 안에도 기쁨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상한 사과로도 썩은 부분을 잘 도려내 맛있는 잼을 만들어 내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런데 나는 불행히도 그런 모양으로 생기지 못했다.




세상과 나에 대한 정보, 그 정보를 기반으로 좋은 사과를 잘 골라낼 수 있는 지혜. 그리고 어쩌면 좋지 않은 사과가 걸렸을 때 배가 좀 고파도 버리는 용기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 사회에선 필요한 덕목일지도 모른다.


꿈을 찾는다라는 표현은 정말이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어딘가 꽁꽁 숨어 있는 꿈을 찾아 운명의 만남을 갖는 사람은 정말 극히 드물다. 내가 만난 훌륭한 사람들도 대단한 신의 계시를 받아 갑작스레 꿈에 헌신한 이는 거의 없었다. 다만 열심히 방황하고 고민하며,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훌륭했고 또 나날이 더 훌륭해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꿈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시간과 정보와 인내를 뭉쳐 나만의 모양으로 쌓아 올려 나가는 것. 과거의 나를 만난다면 좋은 꿈을 만들어 가기를 응원한다고, 꼭 한 번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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