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의 것도 아닌
어느 마을에 아이가 생기길 고대하던 여인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여인은 삼승 할망을 모신다는 노인을 찾아갔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나요?”
노인은 여인에게 씨앗 한 알을 쥐여 주었다.
“이건 농부가 밭에서 키우는 것과는 다른 거라네. 씨앗을 심어 두고 어찌 되는지 기다려보게.”
집으로 돌아온 여인은 씨앗을 화분에 심고는 해와 바람이 잘 드는 곳에 두었다. 씨앗은 이내 큰 꽃봉오리를 피웠지만, 어쩐 일인지 봉오리가 열리지는 않았다. 꾀꼬리처럼 노란 꽃봉오리에 반한 여인은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퐁 하는 소리와 함께 꽃봉오리가 열렸다. 활짝 핀 꽃 속에는 아주 작은 소녀가 있었다. 머리카락은 가장 깊은 밤처럼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는 밤에 뜬 별처럼 반짝였다. 여인은 엄지만큼 작은 소녀의 이름을 엄지라 짓고 애지중지 돌보았다. 밤이면 잘 말린 호두 껍데기에 파란 꽃창포를 겹겹이 깔아 엄지를 눕히고는, 보드라운 갯메꽃 꽃잎을 덮어주었다. 낮에는 큰 사발에 물을 조금 담아 나뭇잎을 띄워두었다. 엄지는 나뭇잎을 배 삼아 물놀이를 즐기며 노래를 불렀다. 달콤한 목소리에 여인은 매일 행복했다. 행여 엄지가 다칠까 걱정도 매일 늘어갔다.
“아가야, 너에게는 모든 게 위험하단다. 햇볕도 바람도 벌레조차도 모두 조심해야 해.”
엄지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답답한 엄지는 열린 문틈으로 나가 밖을 구경했다. 그 사실을 안 여인은 벼락같이 화를 냈고, 반짇고리 상자를 비워 엄지의 방을 만들었다. 높은 상자 뚜껑에 뚫어놓은 숨구멍을 빼고는 사방이 막힌 방이었다. 여인의 눈물은 엄지를 얌전히 상자 안에 머물게 했다. 한 달 두 달, 달콤하던 노랫소리가 흐느낌으로 변했다. 야위어가는 엄지를 위해 여인은 잔뜩 음식을 만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던 어느 밤, 두꺼비 한 마리가 상자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두꺼비는 숨구멍으로 얼굴을 마구 들이밀었다. 마침내 숨구멍 하나가 크게 찢어지자 두꺼비는 상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두꺼비는 엄지가 잠든 호두 껍데기를 움켜잡고는 순식간에 담벼락 너머로 도망쳤다. 담벼락 근처 진흙탕에 있던 아들 두꺼비는 엄지를 보고 요란스레 울었다.
“코……윽스, 코……윽스, 브레……엑……에크……켁!”
어미 두꺼비는 소리를 낮추라며 아들을 나무랐다.
“너희가 살 멋진 방을 만들 동안 이 아이를 시냇물 속 수련 잎 안에 두어야겠다. 워낙 작은 아이라 거기에 두면 달아나지 못할 거야.”
어미 두꺼비는 곧바로 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수련 잎 속에 엄지가 잠든 호두 껍데기를 가져다 놓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엄지는 자신이 물 위 잎 속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엄지를 두꺼비들이 찾아왔다. 엄지를 신혼 방에 데려가기 전에 호두 껍데기부터 옮기기 위해서였다.
“얘가 네 신랑이 될 내 아들이란다. 곧 즐거운 집에서 함께 살 게 될 거다.”
두꺼비들이 호두 껍데기를 갖고 헤엄쳐가는 모습을 본 엄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두꺼비와 살아야 한다니, 온몸이 떨렸다. 물속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물고기 중 화나지 않은 물고기는 없었다. 물고기들은 엄지를 구하기 위해 수련 잎줄기를 갉아대기 시작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물고기들은 끊어진 수련잎을 타고 흘러가는 엄지를 향해 소리쳤다. 엄지는 두꺼비들이 쫓아올 수 없을 만큼 멀리 떠내려갔다.
엄지는 여러 곳을 지나쳤다. 새들도 나비도 엄지를 향해 저마다 외쳤다.
“힘을 내. 멈추면 안 돼.”
슬퍼하던 엄지도 그들의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자 나뭇잎을 타고 스쳐 가는 모든 게 좋아 보였다. 그때였다. 왕풍뎅이가 엄지 곁을 맴돌더니 덥석 엄지를 움켜잡고는 근처 나무로 데려갔다. 왕풍뎅이는 엄지에게 꿀을 건네며 예쁘다고 칭찬했다. 다른 풍뎅이들은 엄지를 못마땅해했다.
“다리가 두 개뿐이라니 정말 볼썽사나워.”
“더듬이도 없고 허리도 쪼그라들었어. 아휴, 창피해.”
모두 엄지를 향해 손가락질해대자 왕풍뎅이도 엄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왕풍뎅이는 엄지를 개망초꽃 위에 던져두었다.
여름 내내 엄지는 숲에서 살았다. 그러나 겨울이 오자 엄지를 찾아오던 새들도 떠났고, 나무와 꽃도 시들어갔다. 추위에 떨던 엄지는 숲 근처에 사는 들쥐 노파의 문을 두드렸다. 들쥐는 배고픔에 지친 엄지를 위해 방을 내주었다. 고마워하는 엄지에게 들쥐는 속삭였다.
“이웃에 사는 두더지 신사가 우리 집에 놀러 올 거다. 아는 것도 많고 부자니까 친절하게 대해야 해. 그와 결혼하면 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엄지는 파란 하늘이나 초록 숲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두더지가 좋아지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멋진 옷을 입었는지 자랑하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얼마 뒤 엄지는 두더지가 파놓은 땅굴 속에서 꼼짝 않는 제비를 발견했다. 두더지와 들쥐는 '고작 지지배배 울어대기만 하다 얼어 죽었다'며 제비를 비아냥댔다. 엄지는 몰래 제비의 깃털을 쓰다듬고는 감은 눈에 입을 맞추었다. 그날 밤, 엄지는 지푸라기로 커다란 덮개를 짜서 제비에게 덮어 주었다. 차디찬 땅속이지만 따뜻하기를 기도했다. 그 기도가 통했던 걸까. 엄지는 제비의 심장이 아주 약하게 뛰고 있는 걸 알아챘다. 엄지는 밤마다 제비 곁을 지켰다.
“고마워, 친절한 소녀야. 몹시 따뜻했어.”
힘겹게 눈을 뜬 제비를 엄지는 꽉 껴안았다.
다시 봄이 왔다. 제비는 엄지에게 자신과 떠나자고 했지만, 엄지는 그럴 수 없었다. 두더지의 청혼으로 억지 결혼을 할 처지에 놓였지만, 결혼으로 은혜를 갚으라는 들쥐의 요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가을이 되자 엄지의 혼숫감이 모두 준비되었다. 엄지는 들쥐에게 두더지가 싫다고 다시 호소했다.
“두더지 신사의 창고에 얼마나 음식이 많은지, 입은 옷은 얼마나 좋은지 아니? 죽어가던 널 살려준 게 나니까 시키는 대로 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지.”
이윽고 결혼식 날이 되었다. 햇볕을 싫어하는 두더지와 결혼하는 순간 엄지는 영원히 땅속에서 살아야 했다. 엄지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 땅 위로 나왔다. 휑한 들판에서 태양을 향해 ‘제비에게 내 안부를 전해 달라’ 읊조리던 엄지에게 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제비였다.
“소녀야, 나는 이제 따뜻한 나라로 갈 거야. 같이 가자. 언젠가 너와 닮은 사람들을 본 적이 있어. 그곳에 가볼 수도 있을 거란다.”
제비의 말에 엄지는 생각했다. 해가 빛나고 꽃이 피는 곳, 나와 닮은 사람들이 있는 새로운 곳.
“그래. 함께 가자!”
엄지는 제비 등에 올라타 가장 튼튼한 깃털에 허리띠를 단단히 조여 맸다. 제비는 바다를 지나 거대한 산맥 위로 날아올랐다. 추위를 느낄 때면 엄지는 제비의 깃털 속으로 파고들었다. 쉼 없이 날기를 여러 날, 둘은 따뜻한 나라에 도착했다. 그곳의 하늘은 한없이 높았고, 공기는 달콤한 풀 향기로 가득했다. 초록 숲과 파란 호수를 지나자 나무 위에 튼 둥지들이 보였다. 제비는 그중 하나로 내려앉았다.
“이곳이 내 둥지야. 나와 같이 살지 않을래?”
엄지는 제비의 깃털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고맙지만, 나는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좋아. 호수를 건너기 전 꽃들로 가득한 들판이 바로 그곳이야.”
엄지는 제비가 내려준 꽃 들판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누군가 자기 어깨를 두드리기 전까지.
“놀라지 말아요. 나는 이 마을에 살고 있어요.”
엄지만큼 작은 사람이었다. 방울꽃을 뒤집어쓴 모습이 재밌어 보였다.
“당신이 여기 주인인가요?”
엄지의 물음에 그 사람은 웃었다.
“이곳은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에요. 나는 마을을 소개하는 안내자고요.”
“그럼 이곳은 위험하지 않은 곳이군요!”
엄지의 들뜬 목소리에 안내자가 조금 곤란한 듯 답했다.
“한 가지 있긴 해요. 옆 마을에 사는 거인들을 조심하세요.”
“그들이 해칠 수도 있다는 건가요?”
“아니에요. 그들은 크고 우리는 작으니까요. 서로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뿐이죠.”
안내자의 말에 엄지는 환하게 웃었다. 자신을 따라오라며 손짓하는 안내자를 향해 엄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