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죽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목덜미 언저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갔다. 난데없이 날아든 쇳소리에 놀란 볕뉘의 오른쪽 볼이 실룩 됐다. 붉은색 끈으로 긴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맨 사내였다. 사내는 투박해 보이는 검정 손잡이가 달린 칼을 쥐고 볕뉘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누구지?’ 눈에 익지 않은 얼굴을 힐끔거리며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사내는 희죽 거리며 볕뉘에게 소리쳤다.
“어이, 더벅머리! 그렇게 한 눈 팔다가는 저 곰 새끼한테 골로 가는 수가 있다고.”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갈지 자를 그리는 웅호비의 칼날이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볕뉘는 양 허리춤에 숨겨둔 작은 표창을 한꺼번에 날렸다. 가볍게 날아오른 표창 중 하나가 웅호비의 왼쪽 귓불을 단숨에 자르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핏방울 따위는 우습다는 듯 웅호비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검정 털로 뒤덮인 두 팔을 거두었다 다시 볕뉘의 가슴을 향해 재빠르게 뻗은 웅호비. 그의 칼날은 볕뉘의 가슴을 가르는 대신 낙엽 더미 위로 떨어졌다. 오른쪽 목덜미에서 뿜어 나오는 붉은 핏줄기가 웅호비의 몸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허옇게 뒤집어진 두 눈이 안쓰럽다 싶더니 큰 몸뚱이가 픽하고 쓰러졌다.
“이놈에 피 냄새는 언제 맡아도 싫다니까. 제기랄, 나한테까지 튀었잖아.”
“너도 어지간히 불평이 많은 놈이군. 이런 덩치를 쓰러트린 건 실력이냐 운이냐?”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대선 붉은 끈의 사내 말에 볕뉘의 두 손이 허리춤을 향했다. 사내는 재빨리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잔뜩 주눅이 든 목소리로 지껄였다.
“농담이야, 농담이라고! 웬 놈의 성격이 그리 불 같아? 넌 칭찬도 못 알아듣느냐?”
“흥!”
“어라, 요것 봐라. 흥? 네놈한테서 분 향기가 솔솔 나는 게 너 여인네구나?”
"흐흥."
“카! 그 참 콧소리 한 번 간지럽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죽이죽 웃으며 떠들어 대는 사내가 귀찮기만 한 볕뉘는 쓰러진 웅호비의 몸을 뒤져 돈이 가득 든 주머니를 찾아냈다. 볕뉘는 주머니를 열어 정확히 스무 냥을 꺼낸 뒤 남은 돈을 피범벅이 된 웅호비의 가슴팍에 쏟아 부었다. 웅호비의 뒷목을 가르고 나무에 박힌 표창까지 모두 챙긴 볕뉘는 성큼 산 밑으로 향했다.
“이런 바보 같은 놈아! 장사 지내라고 동냥이라도 하는 게냐?”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네 갈 길이나 가. 계속 쫑알대다가 너도 저 꼴 되는 수가 있으니까.”
“개구리 독사 잡아먹는 소리 하고 있네. 앞으로 세상을 주름잡을 천하제일 길가온님께서 너 같은 신출내기랑 칼이라도 섞을 줄 아나 보지?”
어느새 나무에서 내려온 길가온은 볕뉘의 뒤를 졸래졸래 따르며 쉬지 않고 입을 놀려 됐다. 몇 번 으름장을 놓던 볕뉘도 산을 다 내려올 무렵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내가 저를 따라오든 제 갈 길을 가던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웅호비와의 싸움으로 잔뜩 지친 터에 말 많은 얼간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해가 저물 때쯤 마을로 이어진 흙길로 들어선 볕뉘는 망설임 없이 걷기 시작했다. 볕뉘가 마을로 가는 것을 확인한 길가온은 대뜸 볕뉘의 걸음을 따라잡으려 재빨리 공중제비를 돌았다. 제법 큰 키에도 훌쩍훌쩍 공중을 가로지르는 모양새가 어디선가 무술 흉내라도 내본 듯했다. 길가온은 볕뉘를 앞지르며 소리쳤다.
“천하제일 길가온님 먼저 가서 기다리신다. 꽁지에 불붙은 듯 휑하니 쫓아오느라.”
연거푸 공중제비를 돌며 저만치 가버린 길가온의 모습에 헛웃음을 짓던 볕뉘는 웅호비로부터 가져온 돈을 꺼내 들었다. 푼돈이지만 당분간 조용히 지내기에는 충분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마을에 내려와 도둑질을 일삼는 웅호비를 잡는 이에게 스무 냥을 준다는 방을 본 것은 사흘 전이었다. 부쩍 뜨끈한 국물이 그리워 입맛만 다시던 볕뉘는 방을 보자마자 산으로 향했다. 곰처럼 크고 호랑이처럼 무섭다는 웅호비는 소문 이상으로 엄청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출중한 무술 실력은 없었지만, 배꼽 언저리에서 터져 나오는 웅호비의 괴성은 볕뉘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혹시나 해서 챙겨놓은 허리춤 표창이 아니었다면 볕뉘 역시 웅호비의 칼맛을 제대로 봤을 터다. 볕뉘가 죽은 웅호비를 마을로 끌고 가지 않은 건 단지 귀찮아서였다. 사실 혼자 힘으로는 무리이기도 했지만, 중요한 건 일을 마쳤으니 약속된 대가를 챙기는 것이었다. 볕뉘는 방에 쓰인 대로 딱 스무 냥을 챙겼다. 마을 사람들한테 받으나 웅호비의 주머니를 뒤지나 다를 게 없기 때문이었다. 웅호비의 돈이 곧 마을 사람들의 재산이 아니었던가.
마을로 들어섰을 때 해는 완전히 져 있었다. 어둠과 함께 찾아온 늦가을의 한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봄과 여름을 달랑 옷 두 벌로 난 처지라 갑작스러운 한기에 볕뉘의 몸이 으스스 떨렸다. ‘어디 가서 뜨끈한 국물이라도 마셔야겠군. 눈 붙일 곳도 찾고.’ 마을 입구에 있는 첫 번째 주막으로 들어선 볕뉘는 평상에 대자로 누운 길가온을 발견했다. 한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코까지 고는 길가온이 볼 새라 멀찍이 떨어진 자리를 택했다. 길가온을 등지고 앉아 국물을 청하려는데 누군가 등허리를 꽉 껴안았다. 놀란 볕뉘의 손이 본능적으로 칼을 찾았지만, 칼은 이미 상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 재빠름에 감탄한 볕뉘는 힘찬 기합과 함께 발목 어귀에 숨겨둔 단도를 꺼내 상대의 발목을 향해 휘둘렀다. 칼날이 발목을 가르는가 싶더니 평상 한 귀퉁이가 말끔히 잘려나갔다. 잠시 휘청거리던 볕뉘의 등 뒤로 가늘고 긴 칼이 들어왔다. 어깨를 노린 칼을 피해 돌아서는 순간 볕뉘의 머리카락이 댕강 잘려나갔다. 공중으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보자 배꼽 언저리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떠돌이 생활 한지가 칠 년이나 됐지만 이렇게 분노를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볕뉘는 평상에 떨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밟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번쩍이는 상대의 칼을 단도로 힘차게 내리쳤다. 작은 불꽃과 함께 강한 쇳소리가 주막 안을 가득 채웠다. 주막 곳곳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꿈쩍 도하지 않고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부엌에서 술을 내오던 주모마저 그대로 부엌 문턱에 걸쳐 앉아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볕뉘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자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상대의 오금을 노리는 듯 발을 휘두르는가 싶더니 왼쪽 허리춤에서 표창을 꺼내 날렸다. 휭 하고 바람을 가른 표창이 주막 서까래에 제대로 박혔다.
“이놈에 더벅머리야! 사람 죽일 일 있느냐. 나야 나, 길가온님이라고.”
달빛 아래로 얼굴을 쑥 내민 건 정말 그 사내였다. 사내는 서까래에 박힌 표창에 제법 놀랬는지 한껏 커진 눈을 껌뻑였다. 볕뉘는 상대가 길가온임을 확인하자 부아가 치밀었다. 코까지 골며 잠든 척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단도를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남 일에 상관하면 네놈 멱을 따주겠다고 했지. 각오해.”
“잠깐만 잠깐만. 장난친 거라니까. 나 길가온님이라고. 아니, 네 친구 길가온이야.”
친구라는 말에 잠깐 움찔한 볕뉘는 거칠게 칼을 거두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새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주모가 다가왔다. 주모는 화난 기색도 없이 볕뉘의 단도에 잘려나간 평상 값을 읊어 됐다.
“딱 두 냥이우. 싸우려면 끝을 봐야지 왜 무게만 잡누.”
따끈한 국물 값까지 석 냥을 건넨 볕뉘는 한층 가벼워진 주머니 사정에 작은 한숨이 나왔다. 건너편에 앉은 길가온이 볕뉘의 한숨을 듣고 쪼르르 달려왔다.
“뭘 한숨씩이나 쉬고 그래. 다 길이 있는 법이야. 나랑 있으면 굶어 죽지는 않을 테니까.”
볕뉘는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깍지를 끼고 평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구름 속에 갇혀 있던 달이 완전히 얼굴을 드러냈다.
“야, 더벅머리. 아니지. 이 봐 누이. 오라버니가 말씀하시는데 그리 누우면 쓰겠는가?”
“별 거지 같은 얘기 다 듣겠네. 내가 왜 누이야?”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보라는 거지. 누이가 아까 곰 같은 놈이랑 싸우는 것도 그렇고 방금도 칼 좀 쓰더라. 아직 나한테는 안 되지만 기초는 있는 것 같으니까 이 오라버니가 의남매를 맺어주겠다는 거지.”
“흐흥.”
“에구, 콧방귀 한 번 간지럽다. 누이도 좋지? 이 험난한 세상에 의지할 오라버니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자고로 고수는 의로 맺어진 사람 하나쯤 있는 법이지.”
“고수 좋아하네. 너나 나 주제에 무림고수 흉내 내봤자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고. 누가 무서워서 벌벌 떨기라도 할 것 같나 보지?"
주모가 내온 국물을 들이마시며 비웃는 볕뉘에게 길가온이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지금 이곳에도 무림고수가 있을지도 몰라. 누이는 고수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어?”
“흥.”
“하긴 너 같은 놈이 뭘 알겠어.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세상을 홀로 떠도는 이 길가온님의 심정을 안다는 게 신기한 일이지. 가족이라곤 달랑 나 혼자 뿐인 처지라니…."
말끝을 흐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길가온에 볕뉘는 무안해졌다. 괜한 헛기침을 두어 번 뱉고는 국그릇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길가온은 눈물이라도 훔치는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덮는가 싶더니, 곧 볕뉘가 내려놓은 국그릇을 들고 단숨에 마셨다.
“크, 쓰다.”
“미친놈. 술이 아니라 국이다.”
“국도 술도 다를 게 무어냐? 술이라고 생각하면 술이요, 국이라고 생각하면 국인 법.”
“네놈이 원수 타령을 하더니 정신까지 잃었구나. 한심한 녀석.”
“그러니까 능력 있는 누이가 날 도와야지. 누이는 그런 얘기도 몰라. 길을 떠난 의남매가 원수를 물리치고 혼란한 세상을 평정하니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하더라.”
“네 녀석 원수가 누군데?”
“백비.”
“누구?”
“고수 중의 고수 흑비 백비 몰라?”
볕뉘는 길가온의 입에서 나온 흑비 백비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흑비와 백비는 쌍둥이 형제로 머리카락 색을 따라 그리 불리고 있었지만,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때 주인을 잃고 절벽에 선 나라를 자치하기 위해 수많은 무림고수가 수도인 서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무림고수들이 권력에 눈이 멀었다며 한탄하면서도 누가 나라를 차지할지 내기를 하곤 했다. 매일 끔찍한 소식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고, 그들의 싸움을 본 적도 없으면서 사람들은 편을 나누어 또 다른 싸움을 벌였다. 그때가 벌써 십 년 전이다. 흑비 백비 형제가 수많은 고수를 물리치고 나라를 차지했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지금도 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확인할 수 없는 소문만 무성하게 전해졌다. 지금껏 떠돌아다녔던 곳도 서주와는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뿐인 볕뉘에게는 더욱 생소한 일이었다. 확실한 것은 흑비와 백비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이제 없다는 것이다.
“정말 흑비 백비가 원수라는 거야?”
“그렇다니까. 내가 꼭 원수를 갚고 말 것이니라.”
“실력은 되고?”
“안 되니까 누이가 도와줘야 한다는 거지.”
“둘이면 되고?”
“당연히 안 되지. 일단은 의남매를 맺고 살날이 얼마 안 남은 사부님을 찾아내서 권법을 익히면 충분해.”
“흥. 말은 쉽다.”
“오라버니가 하시는 말 중에 빈말은 없느니라.”
“그럼 오래오래 가르쳐줄 사부를 찾아.”
“이런 한심한 녀석아, 아니 누이! 죽을 날을 받아둬야지 미친 듯이 가르쳐주지. 넌 그런 것도 모르느냐? 눈을 감는 순간에 절대고수가 되는 마지막 비법을 제자에게 일러주는 사부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네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데?”
“누이는 그런 끔찍한 일을 잘도 묻는군. 생각도 하기 싫지만 누이라면 오라버니의 아픔을 알아야 하니까 간단하게 들려주지. 십 년 전이었어. 한참 무림고수들의 싸움으로 시끄러울 때였지. 장을 보고 돌아오던 부모님이 집 근처에서 돌아가셨어. 흰색 머리띠를 한 놈들 짓이었어. 내가 똑똑히 봤다고.”
“그게 흑비 백비랑 무슨 상관인데?”
“흰색 머리띠를 했다니까. 백비라고 쓴 머리띠 말이야.”
“네놈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흑비 백비가 최고라고 애들도 그런 머리띠하고 다녔는데 달랑 그거 가지고 원수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 쌍둥이 놈들이 얼마나 무자비한 쓰레기인지 누이는 모르는 모양이군. 그놈들이 무자비하니까 따르는 녀석들도 똑같이 행동하는 거라고. 모름지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단 말이지. 우두머리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는 법이거든.”
촐랑대던 길가온이 잔뜩 진지한 얼굴로 주절거리자 볕뉘는 다시 콧방귀라도 뀌어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흑비 백비가 원수라는 증거도 없는데 무슨 마음으로 복수를 하겠다는 건지 한심한 마음만은 지울 수 없었다.
“일어나 봐, 누이. 엄청난 걸 알아왔단 말이야.”
새벽부터 나갔던 길가온은 날이 밝은 뒤에야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호들갑을 떨어대는 통에 주막이 시끄러워졌다. 오늘따라 더 무거운 몸을 뒤척이던 볕뉘는 그의 호들갑에 불편함을 갖추지 않았다.
“별거 아니면 너 죽는다.”
“누이는 말도 어쩜 이리 예쁘게 하는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드디어 찾았어.”
“뭘?”
“뭐긴 뭐야. 우리 사부님이지.”
“그래서?”
“그래서라니? 우리를 가르쳐줄 사부님을 찾았다니까.”
“그러니까 어쩌라고?”
“정신 좀 차려봐. 사부님한테 배움을 구해야지. 그래야 원수를 갚을 거 아니야.”
“이봐, 너. 그건 네 일이잖아. 난 원수 같은 거 없어.”
“도와주기로 했잖아.”
“그런 약속한 적 없다고.”
“안 돕겠다고 한 적도 없잖아. 네 아픈 과거사를 다 듣고도 이렇게 같이 있는데 당연히 돕는 거지.”
여전히 누워 눈을 꼭 감은 볕뉘의 모습에 길가온이 답답한지 가슴팍을 쳤다. 그런 길가온의 모습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볕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길가온은 다짜고짜 볕뉘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거부하는 볕뉘와 안간힘을 쓰는 길가온. 결국, 주막 마당으로 끌려 나온 볕뉘가 길가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뭐 하는 짓이야? 필요하면 네가 가서 찾으라고. 난 원수도 고수 따위도 다 관심 없다고 말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관심 있을 걸.”
길가온은 볕뉘를 향해 자신의 배를 쭈욱 내밀었다. 의아해하는 볕뉘와 잔뜩 얼굴을 찌푸린 길가온에게 작은 소리가 들렸다. 꼬르륵. 볕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눈빛으로 길가온을 쳐다봤다. 꼬륵 꼬르륵. 볕뉘는 픽하고 웃음을 짓고 말았다.
깨끗하게 비운 국그릇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길가온을 발견한 볕뉘가 주모를 불렀다. 동전 한 닢을 받아간 주모의 손에 들려온 따끈한 국밥 한 그릇이 상에 놓였다. 감동 어린 눈으로 누이를 부르던 길가온은 게 눈 감추듯 그릇을 비웠고, 볕뉘가 남긴 몇 숟가락의 국밥마저 말끔히 먹어치웠다.
“맛있어?”
“누이, 고마워. 내가 의남매 하나는 정말 잘 뒀다니까. 무려 네 끼를 굶었더니 뱃가죽이 등가죽 보고 임자 하면서 착 달라붙더라고.”
“흥. 말 하나는 잘도 하는구나.”
“정말? 누이 눈에 내가 그렇게 말을 잘해?”
“고수가 말 잘해서 뭐 하려고? 무술을 잘해야지?”
“그러니까 우리가 사부님을 찾아서 배우면 최강의 고수가 될 거라고.”
“그게 어디 있는데?”
“바로바로 서주 가는 길에 있는 작은 마을이지. 요 마을을 지나야지 서주로 들어갈 수 있거든. 예전에 흑비 백비가 고수들을 모조리 죽이고 혹시나 다른 고수가 나올까 봐 무술의 무만 들어가도 물건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몽땅 불태웠는데, 그곳이 우리가 갈 마을이라는 거지.”
“다 없애 버렸다며?”
“자고로 없애려는 놈이 있으면 숨기려는 놈이 있기 마련인 법. 마을 뒷산 깊은 곳에 마지막 고수가 숨어 있다는 걸 내가 알아냈지.”
“마지막 고수?”
“누이도 슬슬 관심이 생기는구나. 흑비 백비도 부르르 떨 정도로 고수였대. 많이 다치긴 했지만 제자 하나 아니 둘 키우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지.”
“그거 사실이야?”
“세상이 흉흉하니까 누이가 오라버니를 못 믿는구나. 내가 증거를 보여줄 테니까 빨리 서주로 가자고.”
억울해진 길가온이 볕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볕뉘는 그런 길가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재촉하는 모양새가 어릴 적 키우던 삽살개 같았다. 갑자기 사라진 삽살개를 찾아내라고 울며불며 난리를 피웠던 때가 생각났다.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주던 이가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뺨을 스치는 그 손이 참 보드라웠다는 것만 잊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서주로 이어진 길 초입에 서서 보이지도 않는 서주를 바라보았다. 간간이 표창을 날리는 자신을 흉내 내며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길가온에게 볕뉘가 말을 건넸다.
“너, 이제 가라.”
“그래, 가자고.”
“아니, 넌 서주로 가고 난 나대로 가고.”
“무슨 말이야, 누이?”
“따로따로 가자는 거야. 난 서주 갈 생각이 없다.”
볕뉘의 단호한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서 있던 길가온이 덥석 볕뉘를 껴안았다. 숨이 막히도록 껴안은 통에 볕뉘는 두 팔을 버둥거렸다.
“잘 가, 누이.”
길가온은 짧은 인사와 함께 훌쩍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어느 때보다 재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온은 보이지 않았고, 볕뉘는 서주 반대 방향을 향해 발걸음 뗐다. 그러나 얼마 걷지도 않아 볕뉘는 걸음을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너무나 가벼운 허리께. 볕뉘의 허리가 비어 있었다. 허리에 달고 다니던 작은 주머니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금껏 자신을 지켜준 주머니였다. 게다가 그 주머니는 어머니가 주신 단 하나뿐인 선물이었다.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의 옷장에서 발견한 주머니에는 고운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자신의 이름을 닮은 수였다. 어린 딸의 선물로 어머니가 직접 만든 것임에 틀림없었다. 볕뉘는 어머니의 선물을 허리께에 차고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이런 우라질 놈. 감히 내 걸 훔쳐가.”
시뻘게진 얼굴로 서주를 향해 냅다 달리던 볕뉘는 길 중간에 떡 하니 버티고 선 길가온을 발견했다. 길가온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의 허리춤에는 볕뉘의 초록색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주머니를 본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난 볕뉘가 평소보다 두 배는 높게 날아올랐다. 그러나 이미 예상하고 있던 길가온은 재빨리 몸을 피했고, 볕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이 주머니가 나한테 있는 거 있지. 그래서 이 몸이 갈 길도 바쁜데 딱 기다리고 있었다니까. 자, 이렇게 누이 주머니는 누이가 차고, 서주로 함께 출발!”
길가온은 땅바닥으로 떨어진 볕뉘의 허리에 주머니를 동여맸다. 곧 꼼짝 앉고 누워있는 볕뉘를 일으켜 세워 서주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돌아온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볕뉘는 몇 번 몸을 비트는가 싶더니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주를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늦은 가을바람이 일으킨 흙먼지가 둘을 뒤따르고 있었다.
“나, 성공할 수 있겠지?”
서주에 가까워질수록 길가온의 말수는 줄어들었다. 서주로 이어지는 마지막 마을에 들어서자 긴장하는 빛이 역력해졌다. 볕뉘는 점점 얼어가는 길가온을 곁눈질하며 덩달아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자신이 낯설었다.
“누이, 우리 성공할 수 있겠지?”
“지금도 안 늦었어.”
“… 누이는 왜 혼자야?”
뜬금없는 물음에 볕뉘가 길가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미안. 뭐 그냥 꼭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고….”
“어머니는 잘 기억이 안 나. 아버지는 열 살 때 죽었고. 그때부터 혼자 살았어. 더 궁금한 거 있어?”
“열 살 때부터? 그냥 고향서 살지 그랬어?”
“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나온 거야. 집세 치를 돈이 없으니까.”
“그래도 정착을 해야지. 땅이라도 갈면 됐잖아.”
“집도 없는데 땅이 어디 있어?”
“하긴 열 살짜리 코찔찔이한테 땅을 빌려 줄 사람은 없지.”
“흥.”
“나라면 떠도느니 기생이라도 했겠네.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쁜 옷도 입고. 흐흐.”
“왜 기생 되게 잘라줄까?”
“내 말은 기생이라도 해서 땅 살 돈을 벌었으면 정착할 수 있었다는 거지. 뭐 누이가 기생이 되기에는 좀 부족하긴 하지. 기생이 되려면 무엇보다 얼굴이 중요하니까.”
“백비보다 네 녀석 목덜미에 칼날을 꽂아주고 싶은데, 어때 한 번 날려줄까?”
“또 왜 그래, 누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뜻이 그런가. 에이, 더러워서. 툭하면 꽂는데…….”
“다 들린다.”
“우리 누이는 귀도 밝으시고 칼도 잘 꽂으시고 최고라니까!”
“흥.”
"언제까지 할 거야, 누이는?”
“뭘?”
“이렇게 떠도는 거?”
언젠가 볕뉘 자신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어떤 답도 생각해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답을 찾아야 할 물음이라는 걸 알고 있다. 길가온은 볕뉘의 대답을 재촉하는 듯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며 거꾸로 걸었다.
“아마 세상이 끝나거나, 목숨이 달아나면 이리 떠도는 것도 멈출 수 있겠지.”
“그럼 세세상을 바꾸면 되겠네. 안 떠돌게.”
“그럴 만한 능력 있어?”
“뭐 그거야… 키우면 되는 거 아니겠어.”
“더듬는 거 보니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 알고 있네.”
“빨리 사부님을 찾아서 부모님 원수를 갚아야겠다.”
길가온은 무안한 듯 손가락 칼로 허공을 찌르며 괴성을 질러댔다. 볕뉘는 그런 길가온을 보며 생각했다. ‘넌 좋겠다. 복수 때문이라도 열심히 살 수 있겠네.’ 문득 자신이 어떻게 7년을 버텨왔는지 의아해졌다. 시간이 떠미는 대로 살아온 자신이 새삼 가엽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서주로 통하는 마지막 마을에 도착한 것은 별이 보이고 나서였다. 길가온은 마을에 들어서자 환호성을 질렀지만, 볕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 애썼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들른 주막에서 볕뉘는 국물을 푸던 주모에게 조용히 물었다.
“주모, 흑비 백비에 대해 아시오?”
“흑비 백비? 그 이름 오랜만에 들어보네.”
“오랜만?”
“그려. 오랜만이지. 죽은 지가 일 년이 다 됐으니까.”
“무슨 소리요? 죽다니?”
“총각, 산에서라도 살다 왔수?”
“언제 죽었단 거요?”
“일 년 전이라니까 그러네. 둘이 나란히 독살됐는데 누가 죽였느냐 하면 지금 서주궁 주인이 죽였지. 마누라 말이야. 형제 둘을 떡 하니 서방으로 두더니 뭐가 못마땅했는지 아기 입술에 독을 발라서 죽였다지 뭐유. 누가 자기 마누라가 애 입술에 독을 발랐을 줄 상상이나 했겠어. 아비가 자기 자식 예쁘다고 쪽쪽 빨아대는 건 당연한 일 아니우. 애가 백비 씨인지 흑비 씨인지 마누라도 몰랐다고 하더라고. 형제가 하도 찰떡처럼 붙어 다니니까 그냥 셋이서 산 거지.”
주모는 흑비 백비를 독살한 여자가 새로운 남편을 맞아 왕으로 세웠고, 지금까지 꼭두각시 왕을 앞세워 주인 놀음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모두 사실이냐는 볕뉘의 물음에 주모는 소문이라면서 금방 말꼬리를 흐렸다. 누가 왕이 되던지 백성들이 무슨 상관이냐며 볕뉘를 부엌에서 쫓아냈다. 볕뉘는 평상에 앉아 옆 사람과 시시덕거리는 길가온을 쳐다봤다. 이 얘기를 들려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길가온은 부엌문 앞에 서 있는 볕뉘를 발견하고는 힘차게 손을 흔들어댔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리 높지는 않은 산이었지만, 산 중턱까지 오르고서도 땀방울 하나 흐르지 않았다. 대낮인데도 차가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도 없었지만 야생동물의 흔적 역시 없었다. 마을과 나란한 산이라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하나는 돌아다니기 마련이었다.
“정말 여기가 맞는 거야?”
“날 좀 믿으라고.”
“기분이 안 좋아.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건 우리밖에 없는 거 같다고.”
“모름지기 고수란 이렇게 묘한 기운이 넘치는 곳에 사는 법이지.”
볕뉘는 어젯밤 주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왠지 길가온에게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아 그가 원하는 대로 고수가 산다는 산에 오르고 말았다. ‘그래. 원수는 못 갚아도 지가 좋아하는 무술이라도 배우면 되는 거지.’ 볕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길가온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제 산꼭대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해. 산꼭대기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왜 같은 자리를 맴도는 거지?”
“벌써 다섯 바퀴째야. 오늘은 일단 내려가자.”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내려가."
“이 멍텅구리야. 이 산 이상하잖아. 너도 느끼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고수가 사는 곳이라고 했잖아. 조금만 더 가면 될 거야.”
마구 고집을 피우는 길가온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볕뉘는 다시 산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내 산꼭대기와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점점 어둠에 묻혀가는 산속에서 두 사람은 서서히 지쳐갔다. 두 사람은 나뭇잎 더미를 이불 삼아 쪽잠을 청했고, 날이 밝자마자 다시 걸었다. 차가운 산바람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밤이면 살을 에는 추위에 손이 곱았다. 낮이라고 나은 것도 아니었다. 추위는 덜했지만 땅에 발이 묶인 듯 걸음이 무거워졌다. 볕뉘와 길가온은 몇 자국 떼는 일이 죽기보다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런 날이 삼일이나 이어졌다. 두 눈이 쾡해지고 입에서 흙내가 날 무렵에야 산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라고는 커다랗고 넓적한 바위와 말라죽은 나무 한 그루가 다였다. 그곳은 아래와 달리 무척 따뜻했다. 둘은 쏟아지는 햇살에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도 없잖아.”
“잠깐만 기다려 봐. 고목 속에서 수행한다고 했으니까 저기 저 나무겠지.”
길가온은 냅다 말라죽은 나무 쪽으로 향했다.
“사부님, 저희를 제자로 받아 주…….”
말을 잇지 못하는 길가온을 향해 볕뉘는 성큼 다가갔다. 나무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속이 빈 채로 말라죽은 나무였다. 사람은 고사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산을 오르는 내내 들떠있던 길가온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길가온이 주저 않자 볕뉘의 두 다리도 완전히 풀려버렸다. 눈앞이 새하얘진 볕뉘는 바위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햇볕에 달궈진 바위가 따뜻했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작은 비명이 가슴속에서 흘러나왔다.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허기를 채운 게 삼일이나 됐으니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위에 나란히 누운 볕뉘와 길가온은 맑은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있잖아, 누이. 나는 사부님께 무술을 배운 다음에 흑비와 백비의 부하로 들어갈 거야. 흑비와 백비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내가 짠하고 나타나서 구해주면 부하로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거든. 그런 다음에 신임을 왕창 얻어서 날 완전히 믿게 하는 거지.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복수의 칼을 꺼내서 둘을 해치우고, 소리 칠 거야. 어머니 아버지, 제가 원수를 갚았습니다!”
“좋은 계획이야.”
“정말?”
“응.”
“그런데 사부님이 없네.”
“다른 사부 찾으면 되지.”
“정말?”
“응.”
“고마워.”
“뭐가?”
“같이 와 줘서.”
“응.”
“그런데 나 배고프다.”
“나도.”
“내려갈까?”
“우선 뭐라도 먹을 걸 찾아보자. 그냥 내려가다간 그냥 죽을지도 몰라.”
“응.”
“여기서 기다려. 뭐라도 찾아볼 테니까.”
“누이는 쉬고 있어. 내가 찾아볼게.”
“제발 말 좀 들어. 아까 봐 둔 게 있으니까 금방 가져오면 돼.”
볕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웠다. 바위의 따뜻함에 풀린 두 다리가 마구 후들거렸지만,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길가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배에 힘을 모았다. 잠시 괜찮아지는가 싶더니 걸음을 떼는 순간 다시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늘도 휘청거렸다. 중심을 잃은 볕뉘의 한쪽 발이 쓱 미끄러졌다. 길가온이 재빨리 볕뉘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바위는 산꼭대기 끄트머리에 있었다. 제대로 미끄러진 볕뉘는 바위 끝쪽에 아슬하게 달라붙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숨이 콱 막혔다. 안개가 가득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떨어지면 산산조각 날 게 분명했다.
“누이, 힘내!”
길가온의 목덜미에서 굵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바위를 붙든 볕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 사람은 조금씩 바위 끝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난 땅만 있었어도 거기서 살았을 거야. 난 집만 있었어도 거기서 살았을 거야.”
“이제부터 땅도 사고 집도 사면되지.”
“넌 부모님 원수 갚고 나면 어떻게 할 거야? 고향으로 돌아갈 거지?”
“몰라. 아무도 없는 곳에 돌아가는 게 맞는 걸까?”
볕뉘는 아까보다 바위 쪽으로 끌려 내려온 길가온을 보며 허리에 찬 주머니를 바위 위로 던졌다. 두 사람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실핏줄이 터진 길가온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흑비 백비 만날 때, 혹시 모르니까 그 주머니를 꼭 갖고 가. 내가 선심 쓰는 거야.”
“시끄러워. 자꾸 말하니까 더 힘들잖아.”
“네 말대로 몸이라도 팔아서 그냥 있을 걸 그랬나 봐.”
“누이는 얼굴이 안 된다니까.”
“미친놈. 원수 꼭 갚아라. 너 때문에, 오라버니 때문에 진짜 힘들었다.”
낡을 대로 낡은 볕뉘의 소맷자락이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기 시작했다. 긴 탄식이 길가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안간힘을 쓰는 길가온에게 볕뉘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따뜻한 국물 한 사발 먹고 싶다."
길가온이 뭐라 답할 새도 없이 소매가 완전히 찢어졌다. 길가온은 번개처럼 손을 내밀었지만, 볕뉘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볕뉘는 아래를 향해 빠르게 떨어졌다. 누이를 부르는 울음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졌다.
마치 한 덩어리 같았다. 볕뉘가 산 아래로 떨어지고 난 뒤 길가온은 바위에 납작 엎드려 꼼짝하지 않았다. 어둠과 함께 찾아온 추위에도, 침을 삼키기도 힘들 만큼 허기져도 엎드려만 있었다.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볕뉘의 남은 소맷자락을 쥔 길가온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옇게 껍질이 일어난 입술과 퉁퉁 부은 얼굴이 꼭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보였다. 누군가 산에서 괴이한 것을 보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휘청이는 다리로 수풀 속을 헤쳐나가는 길가온의 허리에는 주머니가 매달렸다. 초록색 주머니는 그가 걸음을 옳길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누이, 이제 나 어떻게 하지?’ 길가온은 한 가지 물음을 계속 곱씹고 있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뭘 하든 볕뉘와 함께 하겠다고 생각했다.
산을 오를 때와는 달리 내려오는 길은 너무나 수월했다. 여러 날을 한 자리에서 맴돌지도 않았다. 푸드덕, 새 한 마리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산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본 살아있는 것이었다. 길가온의 두 눈이 하늘로 날아오른 새를 뒤쫓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눈부셨다. 핑그르르, 하늘이 땅으로 곧두박질치는가 싶더니 이내 길가온이 널브러졌다. 흙바닥에 처박힌 길가온은 생각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니 시신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길가온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싸우며 볕뉘를 꼭 찾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눈이 완전히 감기자,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