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는 불교적 색채가 깊다. 스님이 된 친구가 등장하기도 하거니와 여러 인물들이 해답을 얻는 곳은 불교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또한 이지안이 자신을 30000살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다. 윤회나 인연과 같은 개념은 모두 불교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엔딩을 살펴보자.
작중 인물이 엔딩 직전에 헤어졌다가 다시 재회하는 것은 한국의 드라마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동안 누적되었던 긴장을 해소하고, 내용전개에 필요한 불필요한 설명을 쳐낼 수 있고, 현재의 상황을 보여주느라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짧은 이별과 재회가 가진 의미는 좀 다르다. 여기에서 두 사람의 이별과 재회가 갖는 중요한 의미는 바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있다.
엔딩 직전의 상황을 보자. 이 때 두 주인공이 이어진다는 상상은 불가능하다. 남자에게는 부인과 자식이 있고 여자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남자주인공에게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이 상황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하든지 상황없이, 마치 로리타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사람은 다시 태어나야 했다.
이지안은 자신이 계속해서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왜 자꾸 다시 태어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여기에 박동훈은 “여기가 집이 아닌데 자꾸 집인 것처럼 착각을 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정희가 말한다. 계속 태어나는 이유는, 지금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기의 집을 찾는 것이고, “집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아낌없이 사랑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것 밖에 없다. “집”이라는 곳,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곳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집사람”이 아니라 “애엄마”가 되었고 집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동시에 이지안이 돌아왔다. “지안”이라는 이름은 “편안함에 도착한다”는 뜻이다. 두 사람이 헤어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포옹을 하였고, 몇 년 뒤 재회하고 다시 헤어졌을 때 이지안에게 묻는다 “이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이지안이 답한다. “네. 네.” 여기에서 대개는 이지안이 새로운 삶을 얻었고 그것이 편안함, 행복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이지안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곳은 박동훈이 함께 있는 곳이고 이지안이 편안함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박동훈을 다시 만났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
몇 년이 지난 뒤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 물리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두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났다는 뜻이다. 의지하고 보살피는 관계를 떠나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두 사람이 연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는 이제 시험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왜 이제와서 두 사람이 연인으로 시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16화에 걸쳐 형성되었던 두 사람의 감정은 무엇이었단 말일까. 나는 이것이 이성으로서의 감정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박동훈에 대한 이지안의 감정. 이지안은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이 박동훈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것은 딸이 아버지를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봐도 이상할 것이 없다.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아빠 침대에 기어들어간다거나, 아빠가 퇴근할 시간을 기다렸다가 문앞까지 나가서 기다리는 것 같은 것이다. 이지안은 분명 20대의 성인이지만, 사실은 청소년의 순간에 갇힌 사람이다. 중학생의 나이에 멈춰서 강제로 어른의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눈물만 또르르 흘리거나 다른 어른들을 상대로 겁없이 구는 것을 보고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이지안은 어린이다. 그녀가 진짜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 박동훈이 이광일과 맞섰을 때, 자신에게 공감해주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진짜 어른을 만난 장면, 다리 위해서 “진짜 애처럼” 우는 장면이다. 어른의 가면이 벗겨진 것이다.
박동훈이 이지안에 대해 가진 감정은 훨씬 모호하다. 이지안의 집안 사정을 알게 된 다음날 박동훈은 이지안에게 이름의 뜻을 물어본다. 그 때 “아들 이름이 지석이라서” 라고 했다. 이지안을 보면서 아들을 떠올린 것이다. 박동훈의 아들이 중학생이고 이지안이 21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지안은 자기보다 중학생 아들과 더 가깝다. 이지안이 고생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들을 떠올리고 안쓰럽게 여겼다고 보는게 자연스럽다. 그 감정은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달라지는데, 예를 들어 7화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있다. 먼저 잔을 내려놓으려다가 상대방이 아직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계속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서 서로 마주보고 웃는 장면이다. 이것은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다만 이 감정이 박동훈에게 지배적인 감정이 되었는가 라고는 볼 수 없다. 16화가 끝나가는 순간까지도, 내 생각에, 박동훈에게 있어서 이지안은 이성이라기보다는 돌봐주어야 하는 딸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강했을 것이다.
엔딩에서 두 인물은 다시 태어나서 새롭게 만났다. 이지안은 믹스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배를 채우던 것에서 여가시간에 전문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사정이 되었고, 아무도 곁에 없던 사람에서 이제는 함께 수다를 떨 수 있는 동료가 생겼다.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박동훈은 아내가 떠났고,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형과 동생, 아내와 자식)이 모두 사라졌다. 두 사람은 동등한 조건에서 서로를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박동훈이 먼저 악수를 청한다. 이것은 나와 대등한 누군가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이지안은 자기가 밥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더 이상 의지하기만 하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수백번을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서로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집, 편암함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상의 해석은 나의 희망회로가 섞인 것이다. 좀 다르게 보자면 이지안은 완전히 독립한 성인이 되었고 행복한 삶을 이루게 되었다. 박동훈을 발견하고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에 의지가 되었던 사람을 만나 벅찬 감동을 느낀다. 언제 다시 밥을 사겠다는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이 장면을 다르게 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무척 힘든 학창시절에 큰 의지가 되었던 선생님을 사회에 진출한 다음에 다시 만나 “네가 졸업하고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선생님 언제 제가 식사를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헤어지는 그런 모습으로 봐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이지안은 20대 초반의 여성이고, 어엿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사회 속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1-2년 정도의 시간 사이에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가정해도 이게 지나친 걸까? 그렇게 보면 ‘편안함에 이르렀다’라는 것은 이지안이 마침내 행복을 찾았고 박동훈은 이지안을 보면서 이지안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느끼고 두 사람이 만족감을 느끼고 헤어진 것으로 봐도 맞지 않을까?
내가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이 드라마의 제목이 “나의 아저씨”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이지안이라는 인물의 갱생 스토리가 아니다. 이지안이 환골탈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지안과 박동훈의 이야기이고, 더 나아가 이지안과 박동훈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이지안과 박동훈 뿐만 아니라 박상훈, 박기훈, 최유라, 정정희, 한상원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각자의 삶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그 모두가 최종화에 이르러 편안함에 이르게 된다. 박상훈은 별거했던 부인과 재결합했고 정희와 상원은 과거의 아픔을 딛고 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기훈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영화를 다시 시작할 생각할 한다 (영화를 시작하는 문제로 유라와 헤어졌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이지안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지안은 직장에서 인정받고 동료와 잘 지내고 행복하다. 누구 하나 빼놓은 사람?
박동훈은?
박동훈은 부인과 별거에 들어갔다. (아들을 보살핀다고 미국으로 건너갔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시어머니를 생각한 핑계로 보인다.) 박동훈의 책상에는 세 사람의 사진 대신에 아들과 부인만 있는 사진으로 바뀌었다. 박동훈은 예전에는 혼자 밥을 먹을 때 쓸쓸해하기는 했지만 슬퍼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박동훈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울고 나올 정도가 되었다. 만약 위의 해석이 맞다면,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졌는데 유일하게 박동훈만 불행해졌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지안이 잘 사는 모습을 보고 박동훈의 마음이 풀렸다고? 그렇다고 해도 박동훈은 가정이 무너지고 홀아비의 삶을 살아야 하고, 박동훈은 혼자 울어야 할 정도로 불행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외의 장면에서 박동훈이 멀쩡하게 웃고 떠든다고 해서 속으면 안된다. 박동훈은 원래 그런걸 바깥에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니까. “박동훈이 울 때는 정말 심각한 것이다”라는 말 기억하나? 박동훈은 엔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보면 이 드라마는 박동훈이 한 아이의 인생을 구제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대신에 자신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아니면 이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보이나?
내가 이지안의 이름이 가리키는 “편안함”이라는 것이 이지안이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박동훈은 행복하게 되었다 라는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다. 박동훈의 다른 삶은 완벽하다. 고통을 주던 부인은 떠났다. 자신만 바라보던 형과 동생에게는 직장이 생겼다. 괴롭히던 상사도 사라졌고 회사를 나왔지만 수입은 이전보다 더 좋다. 모든게 완벽하다. 딱 한가지만 빼고. 박동훈에게 “집”이 없어진 것이다. 이 때 이지안이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편안함에 이르렀다”는 두 번의 대답이 있었던 것이다. 이지안의 대답 속에 나오는 “편안함”이란, 박동훈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 이제 마지막 화에서 비로소 두 사람이 동등한 관계로서, 똑 같은 성인으로서의 관계를 시험할 조건이 만족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