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여행에서도

네덜란드 텍셀섬 여행기 1편

by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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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생일에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게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는데,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 계속 미루다 올해가 그 기회인 것 같아 네덜란드의 Texel 섬으로 가기로 했다.

텍셀 섬은 네덜란드 북쪽 끝에 있는 섬으로, 한국으로 치면 제주도 같은 곳이다. 여행지로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영화 Knockin’ On Heaven’s Door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바다가 네덜란드였던 것이 기억나 검색했더니 이곳이라길래 무작정 숙소를 예매했다.


오전 9시 17분, 원래라면 정확히 이 시간에 기차를 타야 했는데 시간도 안 보고 흥겹게 도시락을 싸다가 지금 나왔다. 순간이동 능력은 없는지라 포기하고 여유롭게 라이덴 역으로 가서 자전거를 주차했다. 아, 휴대폰 거치대를 빼려고 드라이버를 가져왔는데 깜빡하고 그냥 역에 들어와 버렸다. 섬에서 이틀 동안 탈 자전거를 대여해서 거치대가 필요했는데 그냥 지도 없이 돌아서 잘 가보라는 신의 뜻이겠거니 하고 기차에 탔다.

유럽은 어김없이 날씨가 구리구나, 하고 창밖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다 기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에어팟을 빼고 안내방송을 들으려고 했는데 남은 방송이 다 네덜란드어다. 눈치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건너편 칸에서 눈이 마주친 여자분이 다가와서 기차 결함 문제로 여기서 내려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일단 내려서 다음 차를 검색했는데 줄줄이 취소로 뜨더니 다음 차는 한 시간 뒤에 온단다. 기다리고, 취소되고, 플랫폼을 옮기고를 반복했더니 예정된 시간보다 2시간 늦게 선착장에 도착했다.

오후 1시 34분, 미리 사둔 예약권을 통해 탑승하는 곳으로 들어왔는데 방금 배가 출발해서 다음 차는 한 시간 뒤에 온다고 한다. 일정이 난리가 났다. 혼자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기다리는 동안 미리 싸 왔던 도시락을 먹으며 기차에서 보던 영화를 마저 봤다.

페리 안은 생각보다 넓다. 카페에 식당까지 있고, 고급 크루즈처럼 앉아 있을 곳도 깔끔하다. 왕복 3유로(약 5천원)에 이정도면 여름에 날 좋을 때 또 와도 좋겠다. 안개가 잔뜩 껴서 갑판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혼자 나가서 구경했다. 바다도 건너편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냥 쳐다봤다.

20분쯤 지나니 Texel에 도착했다. 이왕 북쪽으로 온 거 숙소도 텍셀 내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곳으로 잡았기 때문에 또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여기는 택시는 거의 안 다니고, 작은 마을버스와 자전거만 다닌다.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있어 여름에 친구들을 데려와 자전거 라이딩을 해야겠다.

선착장 바로 앞 정류장에서 28번 버스를 탔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 도시엔 정말 현지인밖에 없다. 라이덴은 국제학생들이 많아 다른 국가 학생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페리를 타고 섬에 도착해 버스를 타는 지금까지 동양인은 커녕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나는 Den Burg에 가서 최종 목적지인 De Cocksdorp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정류장 이름도 어렵고 내려야 하는 정류장역이 도통 나오지 않아 하염없이 기다리다 종점까지 와버렸다. 그래서 같은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가 지피티가 시키는 곳에서 내렸다. 근데 웬걸. 아무것도 없다. 버스도 다시 오지 않고, GPS는 먹통에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한 5분 동안 방황했더니 잔디를 정리하는 할머니 한 분이 보여서 길을 여쭤봤다. 버스에 타서 기사님께 물어보는게 가장 정확하다고, 작은 마을이라 전광판에 정류장이 안뜰 수도 있다고 하셨다. 세상에. 어쩐지 내려야 하는 곳이 안 뜨더라. 감사 인사를 전하고 정류장에 돌아와 알려주신 텍셀섬 전용 앱으로 검색했더니 갑자기 GPS가 잡혀서 걸어가라는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도착했더니 음, 이번에는 버스정류장이 없다. 내 눈에는 풀밭과 자동차 로터리, 간혹 날 지나쳐가는 자전거밖에 안 보이는데 위치상 정확하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맘때쯤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미래세계로 그리곤 했는데, 내 두 발로 몇 시간째 걷고 있는걸 보면 아직 한참 멀었다 싶다. 숙소까지 7.9km라는데, 러닝하면 대충 1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폰만 들여다 보면서 나오지도 않는 길 찾기에 지쳤다. 요즘 기숙사 근처 공원에서 5km씩 뛰기 챌린지를 남몰래 하고 있었는데 이러려고 했나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오늘 처음 보는 더치 부부의 자동차에 타 있다. 10분 전만 해도 정말 다 포기하고 러닝을 하려고 가방을 고쳐매고 지도를 확인했는데, 이 동네에 익숙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산책하고 계셔서 마지막으로 물어보자하고 다가갔다. 지도를 보시더니 숙소가 엄청 멀리 있어서 걸어선 못 간다고,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시겠다고 했다. 같이 가면서 어디서 공부하는지, 텍셀에는 왜 왔고 여기서는 뭘 하는게 좋은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정말 동네에 오래 사신 분이 맞으셨는지 지나가는 거의 모든 사람과 인사를 나누셨다. 한 번은 유달리 너무 쿨하게 인사를 하시고 지나가길래 친구 분이신가 했는데 남편 분이라 하셔서 웃었다.


마을이 작아서 그런지 서로 다 알고있는 모습이 정겨우면서 부러웠다. 내 생각에 한국은 근처에 누가 사는지, 뭘 하고 사는지 서로 궁금해하지 않고, 이제는 그게 ‘예의’라고 주장하기까지 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글쎄, 남에게 무관심하고 싶은 속내를 예의로 포장하지 말자는 다짐을 한다.

아무튼 그렇게 버스정류장까지 도착해서 감사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버스에 내려서도 많이 걸어야 할 것 같다고, 남편을 불러 차로 태워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늘 느끼지만 인복이 말도 안되게 좋다. 아까 쿨하게 지나가신 남편 분에게 전화를 한지 1분이 안되어 정말로 차를 타고 오셨고, 그렇게 나는 지금 네덜란드인 부부가 운전하는 차 뒷자리에 타 있다.

가진 것 중에 드릴 만한 게 한국에서 가져온 마스크팩 하나라 주섬주섬 꺼내 이거라도 드렸다. 이게 뭐라고 너무 좋아하셔서 기분이 좋았다. 한 100개 챙겨와서 여행마다 들고 다닐 걸. 이렇게 신세지는 여행만 할 줄 알았으면 말이다.

숙소는 자전거 도로 한가운데에 오두막집처럼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집을 구할 때도 근처 편의점과의 거리보다 자전거 우선 도로의 유무가 중요했던 사람이라, 자전거 도로를 앞에 두고 넓은 평야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 숙소가 좋았다. 문을 두드리니 인상이 선해보이는 더치 할머니께서 날 맞아주셨는데, 거실로 가보니 할아버지 한 분도 같이 계셨다. 두 분이서 운영하시나 보다.

자신의 손자가 한국어를 공부한다고, 그에게 미리 물어본 한국어로 천천히 자기소개를 하셨다. 서로의 언어로 본인을 소개하는 일은 정말 신기하고 재밌는 일 같다. 나중에 방명록 같은 걸 남기는 칸이 있는데, 한국어로 적어주면 손자의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에 꼭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너무 어렵지 않은 말로 잘 전달하려면 어떤 한글을 써야할까 차차 고민해봐야겠다.


계획대로였다면 걸어서 등대 주변을 살펴보고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도저히 다시 나갈 힘이 없어서 오늘은 숙소에서 영화보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정리하기로 했다. 오후 7시 6분, 싸온 토스트를 대충 집어 먹고 책상에 앉았다. 구불구불한 글씨로 적었던 산책자를 보는데 참, 구구절절하다 싶으면서도 그게 이런 글의 매력이었지 싶다.


아무튼 오늘을 한줄로 정리해보면,

혼자 잘 쉬다오겠다고 떠난 여행에서조차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


(근데 오늘 정말 혼자 해낸 게 단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