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텍셀섬 여행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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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30분, 오늘 목표는 조식을 먹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9시에 나가는 것이다. 일정이 이렇게 빡빡한 이유는 자전거 대여소가 숙소에서 약 8km나 떨어져 있어 뛰어가도 1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어제처럼 하염없이 걸어가다가 언제 오는지도 모를 버스를 기다릴 바엔 시간도 많으니 그냥 뛰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나처럼 주변 인프라 따위 개나 주고 외관만으로 숙소를 잡으면 아침부터 고생길이다. 근데 오히려 신이 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오전 8시 27분, 문 밖에서 아침이 준비되었다는 말이 들려서 나갔더니 귀여운 바스켓이 놓여있다. 열어보니 빵과 음료, 각종 잼과 치즈들이 보기 좋게 들어 있어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잼 중에서도 유리잔에 담긴 것은 텍셀에서 자란 열매로 직접 만들었다는 메시지가 필기체로 깨알같이 적혀있었다. 살짝 신맛이 났지만 시나몬 향도 나는 것이 지금까지 못 먹어봤던 신기한 맛이라 그것 위주로 먹었다.
답례로 어제 그렸던 숙소 그림 뒷장에 감사 인사를 적어 바스켓에 넣었다.
오전 9시 37분, 잠깐 온라인 자막 처리를 해달라는 실장님의 요청에 예상 시간보다 늦게 숙소에서 나왔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다. 안개가 껴서 근방 20m 정도 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길 속에서 8km를 뛰어야 한다니. 아 그리고 지금부터는 생각이 날 때마다 메모하러 멈춰설 수 없으니, 대여점에 도착할 때까지는 녹음기를 켜서 여행기를 진행하려고 한다.
나는 지금 앞도 잘 안 보이는 텍셀 섬의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있다. 10시 30분에는 도착할 수 있을까? 사람은 커녕 이 드넓은 자전거 도로를 다니는 자전거 하나 보이지 않는다.
누가 날 잡아가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 그러나 정말 그러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대체 왜일까? 누가 날 잡아가 봐야 별로 뺏어갈 게 없다는 웃픈 사실에서 비롯된 자신감인 것 같기도. 인복에 대한 과도한 맹신같기도.
10시 18분, 이제 5km 정도 뛴 것 같은데 슬슬 더워지기 시작한다. 섬이라 춥다고 해서 히트텍부터 패딩까지 가져온 옷을 모두 껴입었는데 이 정도까지는 필요 없었을 것 같다. 어디론가 뛰어가려면 너무 많은 옷은 별 도움이 안 된다.
이제 6km 정도 왔는데, 아직은 할 만한 걸 보니 자전거로 단련된 다리와 가끔 공원에서 러닝한 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생각 없이 꾸준히 한 일들이 나중에 기다렸다는 듯 발휘되는 경험은 늘 신기하다.
도로에 아무것도 없어서 말인데, 내가 지금 무모하게 뛰어가는 것이, 체력이 좋다거나 뭐 대단한 용기나 목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실상 이것 외엔 방법이 없어서 그런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 자유의지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갇힌 것뿐인데, 마치 내 느응력으로 선후관계를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여긴 자전거와 자동차가 없으면 달리 방도가 없어서 실제로 아직 대여소에 도착하지 못한 나는 뛰거나 걷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누구든 이런 상황에 처하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걸 마치 내 능력처럼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하려다가 에 그러면 안 되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편하게 살지 않는 하나의 방법은 편할 방법이 없는 곳으로 알아서 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뛰다 보니 느낀 건데 인도가 없는 곳이 굉장히 많다. 내가 비수기인 이 시기에 오지 않았다면 자전거 도로를 인도로 삼아 편하게 러닝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게 가능하다 해도 자진해서 올 만한 또래 대학생이 몇 명이나 될까에 대해서까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10시 48분, 러닝을 시작한 지 1시간 11분만에 드디어 자전거 대여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당에 거대한 자전거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아무도 없어서 벽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하니 그 자전거가 내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커서 이게 어찌된 일인지 생각하며 자전거를 째려보고만 있었는데 불현듯 내가 아동용이 아니라 어른용으로 렌탈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아, 여기 네덜란드였지. 네덜란드는 전 세계 신장 1위의 나라다. 그래서 내가 사는 곳인 라이덴에서도 제일 작은 아동용 자전거를 탔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너무 당연하게 어른용으로 신청을 했다. 아니 키는 작아도 나도 어른이긴 하지 않은가. 어린이 용으로 뭔가를 신청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나도 한참 지나서 생각도 못했다.
이런 끔찍한 사실을 깨닫고 다시 전화를 해서 혹시 더 작은거나 아동용으로 교체할 순 없냐고 물어보니 다른 자전거가 없단다. 멀뚱멀뚱 서서 어떡하지 고민하다 기가 막히게 어제 휴대폰 거치대를 분리하려 챙겼던 드라이버가 생각나서 안장을 조절해보려고 시도했다. 사실 드라이버를 꺼낼 때만 해도 희망찼었는데 5분 가량의 사투 끝에 처참히 실패했다. 보통 몇 번의 사투 끝엔 성공이든 실패이든 자그마한 변화들은 늘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나사는 미동도 없다. 포기하고 올라타 보니 역시나 나는 서커스 하는 사람 마냥 공중에 떠 있고, 의자를 포기하고 서서 타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높은 확률로 20초 안에 넘어져 다리가 아작날 것 같아서 접기로 했다. 렌트비 4만원에 8km를 당차게 뛸 수 있는 다리를 걸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지 않은가. 별 수 없이 가까운 다른 자전거 대여점에 전화해서 당일 렌트가 가능하냐 물었더니 다행히도 가능하다고 해서 15분을 더 걸어 그쪽으로 이동했다.
젠장, 돈을 두 배로 내야 한다니. 바보 비용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며 가다가 곰곰히 따져보니 내가 바보 짓을 한 건 딱히 없었다. 어른이라 어른용을 신청했고, 대여소라는 곳에 상주하는 직원도 없었고, 고객에게 바꿔줄 작은 자전거 여분 하나 없었던 대여소가 바보라면 더 바보지. 이런 저런 자기 위로를 하며 다음 렌트샵에 거의 다와갈 즈음 옷과 모자, 기념품 등을 같이 파는 소품샵이 보여서 홀린 듯이 들어왔다.
그런데 세상에, 내가 라이덴에서 교환 생활을 하며 그토록 찾아 헤맸던 빵모자가 있다. 여행갈 때 쓰고 싶어서 2일 전에 라이덴의 빈티지샵을 모두 돌았는데도 없었던, 내 마음에 쏙 드는 베레모가 예정에도 없었던 두 번째 렌트샵을 가는 길에 있었던 것이다. 이걸 운명이 아니라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쓰자마자 마음에 쏙 들어 바로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다가, 텍셀섬 자석도 하나 샀다. 원래 여행을 다닐 때 자석은 돈 낭비라 생각해서 안 사는 편이었는데, 혼자 안개 속에서 땀에 쩔어 10km를 뛴 도시를 어떻게 잊어버릴까 싶어서 같이 결제했다.
기분 좋게 모자를 쓰고 들어간 두 번째 렌트샵. 일반 자전거, 그중에서도 제일 작은 것으로 달라고 세 번이나 강조하고 드디어 내 신장에 합당한 자전거를 빌렸다. 걸어서 1시간이 넘는다고 떴던 텍셀섬의 등대가 자전거를 타니 24분만 가면 된다고 나왔다. 이 둥그런 바퀴가 왜 이렇게 기특한지. 한결 편해진 상태로 노래를 들으며 등대까지 빠르게 갔다.
도착한 등대의 모습은 안개 때문에 영화에서 봤던 것과는 달랐다. 안개가 어느 정도냐면 거의 도착하기 전까지는 저 자리에 저 커다란 등대가 있는지도 몰랐다.
가까이서 본 등대는 엄청 거대했는데, 설명을 읽어보니 이마저도 다시 지어 원래보다 넓이도, 길이도 더 작아졌다고 한다. 이게 작아진 거라니, 이 나라에서 작은 건 나밖에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여기부터는 Bob Dylan의 Knockin’On Heaven’s Door를 들으며 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이 시점부터 내내 들으면서 갔기 때문)
이제는 정말로 바다를 봐야 할 시간이다. 이 모든 여행의 시작은 영화에 나온 바다 한 장면 때문이었으니까. 나는 별것 아닌 거에 의미를 부여해 대단한 서사를 만드는 일에 나름의 능력이 있다. 그리고 내가 재밌다고 여기는 많은 일들은 대체로 이런 류의 것들이다.
아무튼 참 많이도 걷고, 뛰고, 돌아서 왔다. 노킹온헤븐스도어가 뭐라고. 바다를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시한부 주인공들이 죽기 직전에 본 바다가 100m 앞에 있다.
영화의 내용을 반추하며 모래사장으로 들어왔는데, 안개 때문에 어느 지점이 바다인지를 몰라 걷고, 걷고, 또 걷는 중이다. 이제 내가 걷는 건지 내 다리가 날 걷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점점 모래가 딱딱해지는 게 느껴지더니 바닷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물론 이 안개와 흐린 하늘 속에서 절대로 아름다울 수 없는 바다를 보러 온 바보는 또다시 나밖에 없는 듯하다.
바다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형편없는 바다라니! 퍼킹온헤븐스도어 아냐? 라는 재밌는 말장난이 생각났는데 말할 누군가가 옆에 없어서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바다가 못생겼다고 허탈하거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럴 줄 모르고 온 게 아니었으니 사실 내가 바랐던 건 이런 모습의 바다였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과 대사가 떠올랐다.
영화를 보면 시한부 주인공 두 명이 죽기 전에 서로가 소원으로 적은 것을 하나씩 이루자고 말하는데, 그 중 한 명의 소원이 자신의 어머니한테 분홍색 캐들락을 선물하는 거다. 분홍색 캐들락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본인의 엄마에게 선물한 차로, 엘비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엄마가 그 얘기를 했던 것이 주인공의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분홍색 차를 선물받은 주인공의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멋지구나’
‘참 아름다워’
‘그런데 난 면허가 없단다’
‘너도 엘비스가 아니잖니’
주인공이 죽기 전 소원으로 엄마에게 차를 선물하지만 정작 엄마는 면허도 없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엘비스가 아니다.
세상은 그런 거 아닐까. 남이 했을 때 멋지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을 따라가 보면 늘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 나는 그들이 가진 면허가 없고, 정확히는 각자가 가진 면허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아니다.
오늘도 그런 것 같다. 이 정도로 고생해서 차근차근 만든 서사의 마지막에는 영화 같은 바다가 펼쳐져야 했겠지만, 그것과 정확히 상반되는 장면이 내 눈 앞에 있다. 사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그럴 것이란 걸 알고 온 것 같다. 그렇다면 기대와 다를 걸 알고도 먼 길을 가는 마음은 무엇일까?
세상에 모두에게 똑같이 아름다운 곳은 없다는 진실을 마주할 수 있어서겠지. 이 말을 살짝 비틀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의도된 결말까지 큰 논리적 비약 없이 갈 수 있다. 이런 걸 확인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후 1시 45분, 축축한 모래 위에 앉아 하나 남은 주먹밥을 먹으며 바보 같은 바다를 바라봤다. 원래 돗자리를 챙겼었는데 날씨 때문에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출발하기 직전에 가방에서 빼버렸었다.
달리고 달려서 왔더니 보이는 건 회색빛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안개고, 그걸 풍경삼아 젖은 모래 위에서 차가운 주먹밥을 씹는 일을 지금 미리 경험해서 다행이다. 그리고 그런 일도 마냥 재밌어서 다행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뭔가 더 돌아보진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가까운 카페를 찍고 들어왔다. 따뜻한 커피와 치즈케이크 하나를 시키고 가져온 이북리더기로 책을 읽었다. 오후 4시, 카톡이 울리기 시작해 폰을 열어보니 한국 시간으로 내 생일인가보다.
하나씩 답장을 하는 와중에 카페 마감 시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아 짐을 싸고 나왔다. 근처에 있는 PLUS 마켓에 갈 예정이다
텍셀 섬은 원래 맥주로 유명해서 종류별로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딱 하나만 먹기로 했다. 혼자 왔기도 하고, 여름에 다시 와서 다른 맛의 생맥주를 먹어보고 싶어서.
어떤 걸 살지 고민하다 옆에서 같이 맥주를 고르는 할아버지께 내가 꼭 먹어봐야할 맥주 하나만 골라달라고 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를 가리키시길래 감사 인사를 전하고 그걸로 골라 숙소로 돌아왔다. 산책자를 다 옮겨 쓴 후엔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봐야지.
오늘을 한 줄로 정리하면
나도 마틴과 루디가 아니더라
(*마틴과 루디는 주인공 이름이다.)
(기대했던 것과 다르면 그럼 그렇지 하고 툭툭 털고 돌아가면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