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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아르 Feb 21. 2024

나는 무엇을 믿는가

2024년 2월 21일의 기록

가끔 저에게 어떻게 혹은 무엇을 믿는가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온라인뿐 아니라 저를 좀 아는 오프라인 지인도 묻습니다. 그래서 적어봤습니다. 날자를 굳이 포함한 이유는 제 생각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관점이나 근본주의 해석에 대한 비판을 보면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게 생겼지만, 저는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하고 2주에 한 번씩 설교를 번역하며, 구역 리더이며 십일조도 합니다. 성경 읽기를 인도하며 매일 묵상을 나눕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교회에서 보이는 제 모습은 나름 신실합니다. 


"믿습니다"하는 보수적 신앙보다 따지고 분석하는 이성이 주도하는 신앙이지만 (톰라이트보다는 마커스보그를 좋아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나 찬양을 할 때는 감격의 눈물도 흘립니다. 몇 시간이고 방언으로 기도하기도 하고, 중보의 힘도 믿습니다. 솔직히 저도 다중인격 같은 제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믿는가 종종 질문하지만 명확한 답은 못 찾았습니다. 


우선 저는 '신'의 '초월'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저의 최저기준입니다. 신의 초월을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에 머물러 시간과 노력과 돈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미련 없이 떠날 겁니다. 


'초월'은 '신비(스캇펙의 표현)'와도 통합니다. 만물의 바탕에 깔려있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원리를 말합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선 신적 존재가 있다고 믿습니다. 보그가 말한 '그 이상 (The More)'도 같은 의미고요. 이해되지 않지만 걸어가면 알게 되는 경험들, 그 개인적 체험은 신이 없이 설명 가능한 바깥 세계와는 다른 영역입니다. 


2007년 2월부터 2009년 1월까지 신을 부정하고 살기도 했습니다. 도킨스를 비롯한 무신론자의 책을 읽으며 미련 없이 떠날 준비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을 배제하고 설명되는 세상과 신을 전제하고 설명하는 세상 중에 후자가 더 아름답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개인적인 임재의 체험도 그 결정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신'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신은 기독교보다 큽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신은 여러 형태로 인간을 위해 자신을 드러냈고, 그에 대한 반응이 여러 종교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믿습니다. 어디에든 진리의 파편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더러움이 얼마나 들어갔냐에 따라 종교의 가치는 달라지겠지만요. 


왜 그럼 '기독교'인가. 명확한 답은 없지만, 저는 기독교 안에서 자라났고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은 제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또한 살면서 다수의 신실한 기독교인을 만났습니다. '신'의 도움이 없다면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질문이 생기는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메시지에는 실천적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성경이 '신'의 직접 개입으로 쓰인 문서라 믿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신은 형편없는 신입니다. 성경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비논리와 일관성의 부재를 보며 신이 쓴 문서라 믿는다면 신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저는 성경을 신앙고백의 모음으로 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 신약은 예수를 구세주라 믿는 이들의 신앙고백. 그렇기에 과학적 사실과 충돌되는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음에 거부감이 없고 동성애 혐오를 비롯한 옳지 않은 관점들을 당시 문화적 한계라 받아들입니다. 


그럼에도 전 성경이 신을 알기 위해 가장 중요한 창구라 믿습니다. 직접 쓰진 않았지만, 신은 성경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신의 뜻을 찾아가는 행위가 신에게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길 중 하나라 믿습니다. 


고등학교 때 과학자를 꿈꿨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과학이 신앙과 충돌한다면, 과학의 발달이 신앙을 파괴한다면 어떻게 할까. 그때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파괴될 신이라면 신으로 섬길 가치가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전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을 치열하게 사용한 학문을 통한 발견이 믿을만하다면, 이와 충돌되는 종교적 해석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으로 인해 선악과와 원죄라는 교리가 흔들리는 듯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죄성을 설명한다 생각합니다. 신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르는 삶이 구원이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왔다고 믿습니다. 죽음 이후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구약에는 천국과 지옥의 개념이 없습니다. 억지로 엮으려는 해석이 있지만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보다 지옥은 철저한 신의 부재라 생각합니다. 신의 다스림이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다면 인간세상은 쉽게 지옥이 될 겁니다.  


초월을 믿는 저는 신이 원했다면 이 세계를 6일 만에 창조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렇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기에, 6일 창조의 텍스트는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부활과 승천에 대한 제 관점도 동일합니다. 톰라이트가 말했듯이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하게 하셨다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진화론을 인정하고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읽지 않는다고 모든 초월의 사건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유치한 논리입니다. 이성과 과학은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개입하는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저는 신을 통해 위로와 평안을 얻고, 또 그 길을 걸을 때 보게 되는 신의 섭리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나 쓰나미를 보며 모든 일에 신의 뜻이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런 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랜 생각 끝에 불행은 하나님의 개입 없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지만, 신이 그 불행을 이겨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준다고 정리했습니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저는 제 안의 모순과 비일관성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신앙에는 모순이 존재합니다. 계속 공부하고 묵상하며 이 모순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모든 모순이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신을 알기 위한, 그리고 그 안에서 성숙해지려는 노력은 분명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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